1960년 2월28일 대구 경북고생 800여명이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하고자 경북도청을 향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왼쪽) 당시 오임근 도지사의 요청으로 출동한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20여명이 다치고 필자(성유보)를 포함한 학생 200여명이 연행됐다. (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②
1960년 2월28일 오후 2시께 우리 경북고생 800여명은 150평쯤 되는 경북도청 마당을 꽉 메우고 있었다. 학도호국단 부위원장 이대우는 오임근 도지사에게 따지듯 물었다.
“일요일에 우리를 등교시킨 이유가 뭐냐?”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않고 떼지어 도청으로 몰려오다니, 이 무슨 짓이냐?”
오 지사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훈계했다. 뒤쪽에서 “야 집어치워, 무슨 소리 하는 거야”라는 야유가 터져나오는 중에 부하직원 누군가가 도지사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오 지사는 갑자기 태도가 표변해 “경찰들, 뭐 하고 있어? 이 빨갱이 새끼들 다 잡아!”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멋모르고 학생들의 기습 데모를 맞은 도지사가 급히 대구 관내 경찰들을 호출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얼떨결에 도망치기 시작했다. 좁은 정문을 수백명이 동시에 박차고 나가려니 도청 마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청 바깥에는 100여명의 정복 경찰과 사복 형사들이 우리를 체포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키가 작다 보니 꽁무니에서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다. 도청 문을 나오자마자 마치 씨름선수 같은 덩치의 형사에게 잡혔다. 그가 두 팔로 껴안는 바람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가 너무 만만해 보였던지, 그 형사는 나를 한 손으로 잡고는 다른 학생을 낚아채려 했다. 그 틈에 형사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하자, 그는 ‘새로 잡을 고기’는 포기하고 ‘이미 잡은 고기’나마 놓치지 않으려고 내 학생복 소매를 움켜잡아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윗도리 어깻죽지 쪽이 쭉 찢어지면서 나는 다시 형사의 포로가 되었다.
결국 도청 회의실 강당으로 끌려갔더니 무릎 꿇린 학생이 50명쯤 되었다. 도망친 학생들도 곳곳에서 경찰들에게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시민들이나 상인들이 숨겨주어 많은 학생들이 체포를 면했으나 그래도 거리에서 100명이 더 잡히고 말았다.
나를 비롯해 강당에 꿇어앉은 학생들은 국장이라는 한 공무원으로부터 온갖 협박을 당했다, 그는 “너희들 부모나 친척 중에 공무원이 있으면 그분들은 너희들 때문에 다 파면될 거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아버지를 공무원이나 선생님으로 둔 학생들 가운데 몇 명은 “나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잘리겠구나” 하면서 훌쩍이기까지 했다.
오후 5시쯤 됐을까, 그 국장은 “이번에는 처음이니까 용서해준다. 다음에는 국물도 없다”고 말하더니, 우리를 인계받으러 온 선생님들에게 넘겨주었다. 우리는 그길로 선생님을 따라 학교로 돌아왔다. 오전에는 기세 좋게 보무도 당당하게 교문을 박차고 데모에 나섰던 800명이 도청까지 행진했다가, 오후에는 ‘패잔병’이 되어 되돌아온 것이다.
선생님들이라고 무슨 하실 말씀이 있었겠는가? “집에 가서 푹 쉬고 내일 다시 보자”고 하시면서 우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날 밤 우리집은 물론이고 집집마다 부모와 자식들 사이에 한바탕 난리가 난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시 고교생들의 반정부 데모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교생 데모라고 하면 이승만 정권이 공산권 휴전감시단이던 체코와 폴란드 대표들을 내쫓으려고 중고생들을 동원했던 ‘관제 반공 데모’를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어른 세대도 고교생들이 직접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리라고 생각했겠는가.
독자들을 위해 이승만 정권 시대 경찰력 상황을 해설하자면, 당시 전국 경찰의 총병력은 3만3000명 정도였다. 오늘날처럼 전투경찰, 의무경찰, 방위병 등의 제도는 없었다. 더구나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경찰력을 관권선거에 총투입하고 있었다. 이날도 대부분의 경찰력은 수성천변의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 유세장에 동원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행정당국의 ‘일요등교 지시’ 때문에 대구에서 ‘6·25 동란’ 이후 최초로 고교생들이 반정부 데모에 나서는 뜻밖의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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