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2·28 대구 고교생 연합시위’의 주역 이대우씨가 한국외국어대 재학 때인 63년 4·19 3돌 기념일을 맞아 당시 상황을 증언한 글이 <동아일보>에 실렸다.(왼쪽) 부산대 명예교수였던 이대우씨가 2009년 작고한 뒤 이듬해 지인과 후학들이 유고집 <2·28은 살아있다>(세종출판사)를 펴냈다.(오른쪽)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③
1960년 2월28일 선생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길거리로 나선 것은 우리 경북고교생만이 아니었다. 대구고와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사대부고 학생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대구 시내에서는 28일 오후 내내 시위가 이어졌다. 경북대사대부고생들은 야간에 뛰쳐나왔다. 모두 1500명이나 되었다.
‘2·28 대구 고교생 연합 데모’는 “경북고생 이대우의 발칙한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2월26일 긴급 학생회 소집을 허가받기 위해서 교무실로 갔다. 학교당국은 한사코 만류했으나 계속 강행하겠다고 하자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26일 하루 종일 학생들의 토론이 진행되어 점차 일요등교 반대 분위기가 성숙되어 갔다.”
이대우는 훗날 유고집 <2·28은 살아있다>(세종출판사·2010)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이대우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일요등교 거부의 구체적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경북고 단독의 힘으로는 반독재운동의 극대화를 꾀하기 힘들기 때문에 다른 학교와 연대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대구고·경북대사대부고·경북여고·대구농고·대구공고·대구상고·대구여고 학생 간부들을 만나기 위해 이 집 저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대우는 또 “2월27일에는 이은상·김말봉씨 등이 대구에서 자유당 선거유세를 하고 있었다. 이 유세에는 공무원, 학생뿐 아니라 시골사람들까지 동원되었다. 나와 다른 학교 간부들은 일단 자유당 유세를 들으러 갔다. 자유당이 어떻게 유세 인파를 동원하고 있는지를 똑똑히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유세장에서 돌아와 우리집 냉돌방에 둘러앉아 일요등교 반대운동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경북고·대구고·경북대사대부고 등 각 학교 간부 30여명이 모였다. 어둠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잉태되고 있었다. 모두 이의 없이 2월28일 오후 1시를 기해 일제히 일요등교 반대 시위를 하기로 결의했다. 경북고에서 먼저 나가면서 그 길목에 있는 대구상고와 사대부고가 합세해 반월당(백화점)으로 가고, 대구고는 일직선으로 달려와 반월당에서 합세하기로 결의했다. 경찰 저지선을 예상해 최소한 대구매일신문사까지는 가야 우리의 뜻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술회한다. 이들은 이날 헤어질 때 비장한 마음으로 “철창에서 만나자”, “천당에서 만나자”, “만약에 살아남으면 강원도에 가서 화전민이나 되자”고 하면서 뜨겁게 악수했다고 한다.
당시 이대우와 ‘2·28 데모’를 함께 모의한 학생 간부들은 대구고의 손진홍(작고)·장주효·윤풍홍, 경북대사대부고의 최용호, 경북여고의 신구자, 경북고의 안효영·윤종명·전화섭·권준화·이영소·김영갑·임대용·윤무한(작고·1학년 학생대표) 등이었다.
이대우는 1년 선배 하청일에게 선언문 작성을 부탁했다. 자신이 좋아하던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을 꼭 인용해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당시 자유당 독재의 영속화를 위한 일요등교를 지시한 데 분개하지 않은 학생은 아무도 없었을 터이지만,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이대우가 없었더라면 ‘대구 2·28 고교생 연합데모’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나라에나 시대를 앞서 내다보는 선구자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이대우를 비롯해 그와 함께 시위를 모의한 학생들은 모두 ‘4월 혁명’을 예고한 선구자라고 생각한다.
이대우는 그때 이미 “누가 자유를 노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다고 하는가? 누가 시행착오만 거듭하는 사람들에게 민주를 가져다 준다고 하던가?”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독재에 대해 순종할 것이 아니라 저항으로 맞서야 한다는 ‘발칙한 발상’과 ‘발칙한 도전’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대우는 나를 포함해 대부분 ‘범생이’였던 우리들에게, “독재에 맞서 ‘불온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국민은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주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정리 도움/강태영 당시 자유당 독재의 영속화를 위한 일요등교를 지시한 데 분개하지 않은 학생은 아무도 없었을 터이지만,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이대우가 없었더라면 ‘대구 2·28 고교생 연합데모’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나라에나 시대를 앞서 내다보는 선구자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이대우를 비롯해 그와 함께 시위를 모의한 학생들은 모두 ‘4월 혁명’을 예고한 선구자라고 생각한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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