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은 필자를 비롯한 언론인들에게 노동문제를 일깨워준 충격파였다. 사진은 분신 한달 남짓 전인 그해 10월7일 전태일의 설문조사 내용을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경향신문>(왼쪽)과 11월14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실을 전한 <동아일보>(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31)
1968년 11월부터 수습기자 생활 1년이 지나자, <동아일보>는 69년 말 나를 편집부로 발령했다. 애초 수습기자들에게 희망부서 3곳씩을 써내라고 했는데, 나는 많은 동료들이 써낸 사회부 등 외근 부서를 마다하고 제1지망 외신부, 제2지망 편집부, 제3지망을 체육부로 써냈다.
사회부로 가면 일단 일본식 용어 ‘사쓰마와리’로 부르는 경찰서 출입기자로 뛰게 된다. 당시 동아일보사 시경캡(팀장)은 이상하 선배였는데, 호주가였고 호탕하여 모든 사쓰마와리들이 경찰기자 중의 경찰기자로 존경했다. 그러나 술을 입에도 못 대는 나로서는 무엇보다 술자리가 불감당이었다. 그래서 외신부로 가서 국제정세나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영어 실력이 달린다고 봤는지 편집부로 발령이 난 것이다.
그렇게 신문 편집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70년 11월13일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전태일 열사가 청계천 평화시장 앞길에서 온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노동 문제가 언론인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최초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도 존엄한 인간이다”라며 절규한 전태일의 외침에 당시의 언론이 얼마나 공감했는지, 오늘날 이 명제에 대해 언론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전태일은 워낙 집안이 가난하여 공민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65년 17살 나이에 평화시장 재단사로 취업했다. “태일은 어느 날 미싱을 밟고 있던 여공이 새빨간 핏덩이를 재봉틀 위에 왈칵 토해내는 것을 보았다. 각혈이었다. 깜짝 놀란 그는 급히 돈을 걷어서 그 미싱사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진찰 결과는 폐병 3기. 그러나 여공은 자신이 폐병에 걸렸다는 사실보다 회사에서 쫓겨날 일이 더 걱정되는 눈치였다. 예상대로 사장은 치료비 한 푼 안 주고 그 여공을 쫓아냈다.” “피를 토한 여공이 태일에게 준 충격은 그로 하여금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갉아먹고, 삶의 모든 기쁨과 보람을 빼앗아 가며, 우리를 비장한 쓰레기로 만드는 저 잔인한 노동조건을 내 힘으로 바꾸어 보자,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기어이 해 보자고, 다짐하게 했다.”(<전태일>, 김기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년)
전태일은 69년 6월 평화시장 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했다. 그는 1년 동안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 지키기 운동을 전개하자고 떠들고 다니다 업주에게 해고당했다. 공사판에서 건설 막노동을 하던 그는 70년 8월9일 일기에서 “나는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라고 적고 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노동청에 갔다가 기자실에 들러 예전에 조사하다 중단한 ‘노동자 30명의 설문지’를 들고 기자들에게 브리핑했다. 기자들은 “평화시장 노동자가 2만7천명이나 되는데, 30명 조사로는 자료가 부족하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조사하여 다시 우리를 찾아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동시대 기자로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도대체 기자라는 존재가 무엇하러 있단 말인가?” 기자가 직접 취재에 나설 일이지, 노동자들보고 설문조사를 더 해 오라고? 언제부터 언론인이 ‘대서사’가 되었다는 말인가?
전태일은 기자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도 고마워하면서,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개편해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임현재를 총무, 이승철을 서기로 정해 설문조사를 다시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겨우 126명으로부터 응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진정서를 만들어 70년 10월7일 노동청에 제출하고 기자실에 진정서와 설문조사서를 뿌렸다. 이날 설문조사 내용은 <경향신문>과 <매일경제신문>에서만 다루었다.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제목으로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전태일과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크게 보도해준 경향신문을 300부나 사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자 노동청은 10월17일 평화시장 노동조건이 개선되었다고 허위 발표를 했다. 전태일은 이 노동청 발표가 거짓말임을 만천하에 폭로하려면 “스스로 노동운동에 순교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했고 그날 밤 스물둘의 나이로 이승을 하직했다.
71년 4월9일 청계피복과 청계피복노조는 단체협약서를 체결했는데,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요구가 얼마나 소박했는지는 이때 그들이 평화시장 주식회사에 제출한 요구조건 다섯 가지를 보면 알 수 있다. ‘① 작업시간은 여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로 하고, 겨울은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로 한다. ② 일요일마다 정기적으로 쉰다. 부득이한 경우, 작업 초과 시 사전에 종업원의 양해를 구하고 수당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한다. ③ 작업시간을 어기는 기업주에 대해서는 본회의 명의로 고발조치한다. ④ 건강진단은 1년에 두 번 한다. 전염병이 나돌 때는 예방주사를 맞을 수 있게 해 준다. ⑤ 시다들 월봉은 월 3천원 기준에서 100% 인상하여 최하 6천원으로 올린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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