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의 ‘정적’ 김대중 전 신민당 대선 후보가 일본 도쿄에서 대낮에 납치당하는 사건이 터졌으나 당시 <동아일보> 등 언론은 단순 전달이나 축소 보도만 했다. 사진은 사건 다음날인 8월9일치에 2단 기사로 소개한 <동아일보> 1면(왼쪽), 도쿄 납치 현장에 함께 있었던 양일동 민주통일당 총재의 귀국 기자회견을 보도한 8월13일치 1면.(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40)
1973년 8월8일 신민당 대선 후보였던 김대중이 일본 도쿄에서 괴한 5~6명에게 납치되어 실종된 사건이 발생했다. <동아일보>는 이 납치사건에 대해 신용순 도쿄특파원이 보낸 제1신을 8월9일치 1면 하단에 2단 기사로 보도했다. “‘사실상 망명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신민당 전 국회의원 김대중씨가 8일 오후 호텔에 나타난 한국말을 쓰는 5명의 괴한과 만난 뒤 어디론가 사라져 9일 오전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날치 1면 톱기사는 “물가, ‘8일선’ 재동결”, 중간 톱이 “언커크, 미군문제 결의안 합의”였다. 김대중씨 납치사건이 이들 기사에 밀리다니. 더구나 신용순은, 김씨가 바로 전 71년 대통령 선거 때 투표 유권자 45%의 지지를 얻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다는 사실을 감추고 ‘전 국회의원’이라고만 썼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고재욱이었다. 한 나라의 저명한 정치인의 실종을 이토록 초라하게 다루다니 그 자체로 직무유기인 셈이었다.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축소 보도는 계속되었다. 8월10일에는 “김대중 실종 사건, 일경 특수반 설치” 기사가 1면 왼쪽 2단 기사였는데, 1면 톱은 “경주시 황남동 고분, 서기 340년 것으로 판명”이었다.
또 이날 신용순은 납치되기 직전 김대중과 점심을 같이 했던 양일동 민주통일당 총재가 “괴한들이 김대중씨와 잠깐 이야기만 할 테니 조용히 해달라. 시끄럽게 떠들면 창피하지 않습니까?”라고 얘기했다고 하고, 김경인 의원이 “김대중씨가 연행될 줄 알았다면 결투라도 해서 막았을 텐데 설마 했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전했다. 그런데 ‘연행’이라는 단어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참으로 수상한 일이었다. “괴한들에게 납치되지 않고, 연행돼(?), 이런 수사법이 가능한가?” 이로 미뤄 김경인은 납치자들이 한국의 정보기관원들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8월13일 양일동의 귀국 기자회견 내용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신병 치료차 7월16일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호텔에 묵다가 8월4일 김경인이 묵고 있던 그랜드팔레스호텔 2211호실로 숙소를 옮겼다고 했다. 그 직후 납치범들도 바로 옆 2210호실과 2215호실을 빌렸다. 그는 “나와 점심을 하고 나오던 김대중씨를 2210호실로 납치한 뒤 2명이 내 방에 들어와 나와 김경인 의원으로 하여금 30분간 전화를 하지도, 받지도 못하게 막았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이 증언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 취재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기자도, 회사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비하면 <동아방송>은 납치사건을 최대한 신속하고 상세하게 보도했다. 8월9일 아침 8시 ‘뉴스 퍼레이드’에서 김정서 기자가 외신을 종합한 납치 관련 뉴스를 유병무 데스크가 보도했다. 또 8월13일, 피랍된 지 5일 9시간 만에 김씨가 괴한들에 의해 서울의 동교동 집 앞에 버려졌을 때, 밤 10시 반쯤 ‘애국청년단’이라는 괴단체의 전화를 받고 확인한 뒤 밤 11시 ‘김대중 귀가’를 최초로 보도했으며, 노재성 기자가 이날 밤 김대중과 인터뷰한 기사를 14일 아침 ‘8시 뉴스’에서 고수균 데스크의 진행으로 45분간이나 방송했다.
이 납치사건은 오랫동안 미궁에 빠져 있다가 2007년에야 ‘국정원 과거사 조사위원회’에 의해 어느 정도 규명되었다. 하지만 그 전모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국정원 조사 과정에서 어떤 자는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며 짜증을 냈다”고 말했고, 어떤 자는 “당시 김재권 주일공사가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다가 입장을 바꾼 것으로 보아 김대중씨 납치가 박 대통령의 뜻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유신>, 한홍구, 한겨레출판사, 2014)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분노는 그동안 공포 분위기에 짓눌려 있던 학생운동과 재야세력이 73년 가을부터 유신반대 운동의 횃불을 드는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71년부터 유신체제의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해 전국의 모든 대학에서 학생 동아리를 이미 강제 해산시켜 놓은 상태였다. 중앙정보부는 71년 11월 서울대 법대 조영래와 제적생 장기표·이신범, 서울대 상대 제적생 심재권 등 4명을 ‘내란음모죄’로 구속기소하고, 도망간 김근태를 ‘공소 외’로 수배해 놓았다. 이 때문에 대학가에서 일부 동아리 재건과 유인물 뿌리기 등은 있었으나 시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
고려대에서 ‘한맥’, ‘한국민족사상연구회’가 해체된 뒤, ‘엔에이치(NH)회’를 결성하자, 중정은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의 김낙중·노중선, 수배자 손정박, 고대생 함상근·정발기·최기영·박영환·정진영·윤경로·박세희·김영곤·천영세 등을 엮어 ‘간첩단’으로 몰아 구속기소했다. 전남대에서는 지하신문 <함성> 사건으로 이강(법학과 2년), 김남주(영문학과 4년 휴학), 이정호(물리학과 2년), 김정길(경영학과 2년), 김용래(법학과 2년), 이평의(경제학과 4녀), 윤영훈(수학교육과 2년) 등과 졸업생 박석무(당시 고교 교사)가 구속되었다. 73년 5월에는 ‘검은 10월단 사건’으로 고려대생 제철·박원복·유영래·최영주·유경식·김용경·이강식 등이 고문 끝에 구속되었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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