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한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들을 전격 석방했으나 고문 폭로 사태로 민주화 열기에 불을 붙였다. 사진은 2월22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 창립 준비모임.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53)
1975년 들어 유신독재 반대의 물결이 학생운동에 이어 천주교·개신교 등 종교계, 재야 원로, 언론계, 문인, 학자 등 지식인 사회로까지 퍼지자, 박정희 정권은 “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민주화운동 세력과 국제사회에 “국민들은 여전히 나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유신반대 운동의 기세를 꺾어놓을 심산이었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공정한 민주적 절차, 언론탄압 중지, 구속자 석방, 자유로운 찬반투표가 보장되지 않는 한 국민투표는 기만행위”라고 규정했다. 신민당, 민주회복국민회의,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민주수호기독자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은 일제히 국민투표 전면 거부를 선언했다.
그러자 박 정권은 국민투표 거부운동 탄압에 나서 민주회복국민회의의 한승헌·홍성우 변호사 등을 연행했다. 이에 2월6일 윤보선·김수환·백낙준·정구영·유진오·김대중·홍익표 등 국민회의 고문단은 “박정희씨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국민투표가 아니라 재야와의 대화로 민주회복, 경제위기 극복 등의 공동 관심사를 논의하는 것”이라고 성명을 낸 데 이어, 2월8일에는 윤보선·김대중·김영삼 3인의 이름으로 ‘국민투표 거부를 위한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2월10일 국민회의 등 14개 단체는 “국민투표 당일 날 투표를 거부하고 각 교회와 성당에서 인권회복·인간회복·민주회복을 위한 예배, 미사, 기도회를 열 것이며, 독재정권의 폭력에 대해 양심선언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들 단체들은 또한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광고해약 사태에 대한 공동조사를 제안했다.
그럼에도 국민투표는 강행되었고, 박 정권은 ‘79.8% 투표에 73.1% 찬성’이라고 발표했다. 박정희는 실제로 국민의 60% 가까이가 여전히 자신을 신임하고 있다고 믿었던지, 2월15~17일 ‘긴급조치 1·4호’ 구속자 중 인혁당 관련자 23명과 반공법 혐의자 11명을 빼고, 모두 149명을 전격 석방했다.
그러나 이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풀려난 뒤 여론은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민주인사 석방과 환영회 기사와 더불어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서 민청학련 사건 학생들과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 사실이 대서특필된 것이다.
동아일보는 2월17일치 1면에 민청학련 석방 학생들의 고문 증언을 폭로했다. 고 나병식(서울대 문리대 국사학과)은 “작년 4월6일 중앙정보부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잠 안 재우기, ‘해전’(거꾸로 매달고 양동이로 물을 끼얹는 고문), ‘육전’(전신을 마구 두들겨 패는 고문), ‘공전’(공중에 매달고 빙빙 돌리는 고문)과 총살 협박 등 갖가지 고문을 받았으며, 학생 시위의 목적이 용공국가 건설에 있는 것처럼 허위자백을 강요당했다”, “비상군법회의 검찰관의 조사 과정에서 ‘농민·노동자를 사랑하지 않느냐’는 식의 질문을 받고 ‘그렇다’고 대답했을 뿐인데, 공소장에는 ‘노·농정권 수립을 획책했다’고 적혀 있었다”고 말했다. 또 김정길(전남대 상대·제적)도 광주 보안대에서 “김일성 만세를 쓰라고 강요받고 전기고문까지 받았다”고 밝혔다. 이날치 머리기사는 신민당의 ‘고문 진상 조사’ 요구였다.
각 단체마다 ‘출옥인사 환영회’를 열어 “유신헌법 철폐”, “인혁당 인사들에 대한 인권유린 진상규명”, “고문 조작 담당자 엄벌”, “중앙정보부 해체”를 주장한 데 이어 ‘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대표 박형규 목사, 운영위원 지학순·김동길·김찬국·백기완·강신옥·김지하·이철)가 결성됐다.
‘고문 폭로 사태’의 결정타는 동아일보가 2월25~27일 연재한 김지하의 옥중수기 ‘고행…1974’였다.
“잿빛 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어느 날 누군가 가래 끓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누구냐?’고 물었죠. ‘하재완입니더’ ‘하재완이 누굽니까?’ ‘인혁당입니더’ ‘아항 그래요?’ 1사 상 15방에 있던 나와 1사 하 17방에 있던 하씨 사이의 통방(재소자들이 교도관 몰래 창을 통해 서로 큰소리로 대화하는 일)이 시작되었죠. ‘인혁당 그거 진짜입니까?’ ‘물론 가짜입니더’ ‘그런데 왜 거기 갇혀 계슈?’ ‘고문 때문이지러’ ‘많이 당했습니까?’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 버리고 부서져 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 ‘저런 쯧쯧’ 내가 혀를 차는데, ‘그들도 나보고 정치문제니께로 쬐끔만 참아달라고 합디더’ 하고 덧붙이더군요.” “나는 법정에서 경북대생 이강철의 진술, ‘인혁당의 인 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 사람들을 잘 아는 것으로 시인하지 않는다고 검사 입회하에 전기고문을 수차례나 받았습니다’라고 또릿또릿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하는 말을 듣고 소위 인혁당이란 것이 조작극이며 고문으로 이루어지는 저들의 전가비도의 결과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선심 쓰듯 구속 인사들을 풀어줬던 박 정권은 이를 계기로 동아자유언론운동 세력을 제거하지 않고는 유신체제의 유지가 불가능함을 이때 분명히 깨달은 듯싶었다. 2월 하순부터 동아일보사가 박 정권에 굴복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더니 3월 들어 폭풍 같은 현실로 밀어닥쳤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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