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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서울대생 김상진 할복에 ‘긴조 9호’ 발동 / 이룰태림

등록 2014-03-20 19:28수정 2018-05-10 13:26

1975년 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언론인 대량해고 사태를 계기로 박정희 정권의 유신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은 한층 강도를 높였다. 사진은 그해 4월11일 할복한 서울 농대생 김상진 열사의 장례식이 80년 4월 5주기에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열리고 있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975년 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언론인 대량해고 사태를 계기로 박정희 정권의 유신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은 한층 강도를 높였다. 사진은 그해 4월11일 할복한 서울 농대생 김상진 열사의 장례식이 80년 4월 5주기에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열리고 있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56)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수백명의 언론인이 ‘언론자유’를 외치다 거리로 쫓겨나던 1975년 봄 대학가 역시 유신반대 투쟁 열기로 뜨거웠다. 첫 시위는 고려대생들이 시작했다. 권순성·박구진·설훈·김관회·문학진·최규엽·신태식·신계륜 등이 모의를 했고, 3월31일 1500명이 대강당에 모여 비상학생총회(회장 도천수)를 구성해 반독재구국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했다. 4월6~7일에는 2000명이 야간까지 시위를 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고려대만을 대상으로 하는 희한한 ‘긴급조치’를 발동했고, 안암동 교정에 진입한 계엄군은 고대생들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집단폭력을 가했다.

서울대생들 역시 시위에 나섰다. 그해 3월부터 옮겨간 관악캠퍼스에서 원혜영·박우섭·박인배 등이 “첫번째 시위 테이프를 끊자”는 결의를 실행한 것이다. 6일에는 수원의 농대, 7일에는 다시 관악, 8일에는 동숭동에 남은 치대와 약대에서 잇따라 시위를 벌여 53명이 제적되고 16명은 무기정학을 당했다.

4월8일 ‘인혁당’ 관련 7명과 ‘민청학련’ 관련 여정남이 선고 직후 전격 처형당하는 ‘초유의 사법살인 사태’가 벌어지자 대학가는 뜨거워졌다. 이화여대 4000명의 농성을 시작으로 4월10일 중앙대·건국대·경희대·경북대·경기대·숭전대·인하대·장신대·감신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4월11일 서울대 농대 집회에서는 김상진(축산과 4년)이 ‘양심선언’을 낭독하고 할복해 파문을 더했다. 김상진의 선언은 비장했다.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부의 대변자가 되어가고 우리들은 반응 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세멘트 바닥 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있다. …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김상진의 죽음은 이른바 ‘명동성당 학생운동 사건’에도 큰 파장을 끼쳤다. 서울대 문리대 동숭동 시대의 마지막 세대인 심지연(정치학과 68학번)·박홍석(국사학과 69학번)과 고려대 조성우(행정학과 68학번), 중앙대 이명준(신문방송학과 69학번), 외국어대 고 선경식 등은 ‘민청학련’이 시도했던 전국적 학생연대조직을 다시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마침 가톨릭신자인 이명준의 주선으로 명동성당을 활동 공간으로 삼았고, 수석보좌신부 이기정은 이들을 속성으로 교육해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이들은 전국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도 전에 수사기관에 들통이 나서 22명이 구속됐다. 김상진 열사를 기리는 각종 추도미사를 주도하다 꼬투리가 잡힌 것이었다. 애초 6월 초부터 고려대·연세대·한국외대 순으로 거사를 일으킬 계획이었으나 시도조차 못한 이들은 재판을 거부했고 중형을 선고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5월13일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민주화운동이라면 무조건 처벌할 수 있게 한 전제적 명령이었다. 무엇을 금했는가? ‘유언비어의 날조·유포·보도’, ‘집회·시위’, ‘신문·방송·통신·문서·도화·음반 등으로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하는 행위’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위반하면 어떻게 하는가? ‘대표자나 장, 소속 임직원·교직원·학생의 해임이나 제적’, ‘방송·보도·제작·판매 또는 배포의 금지’, ‘휴업·휴교·정간·폐간·해산 또는 폐쇄’, ‘승인·등록·인가·허가 또는 면허의 취소’. 더구나 ‘국방부 장관은 서울특별시장, 부산시장 또는 도지사로부터 치안질서 유지를 위한 병력 출동의 요청을 받은 때에는 이에 응하여 지원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때부터 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때까지 ‘긴조 9호 시대’는 법치가 실종된 암흑기였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은 깨어 있었다. 서울대 문리대생 유영표(인류학과 68학번)는 고 김근태·고 유상덕·고 채광석·채만수·이호웅 등 68~69학번의 동료들로부터 “이제는 시위를 주도할 인물들이 다 드러나 버렸으니, ‘긴조 9호’ 이후 첫 시위의 화살을 당기라”는 주문을 받았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70년대 캠퍼스 1>, 신동호) 그는 고 김도연·김정환·박우섭(자연대 미생물학과 72학번)·이영창(인문대 철학과 4년)·박연호(사대 교육학과 3년)·김배철·정광서·천희상 등을 끌어모아 ‘지금 바로 시위에 나서느냐, 후일을 도모해야 하느냐’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죽은 사람도 있는데 감옥 가는 게 무슨 대수입니까”라는 누군가의 한마디에 격론은 정리됐다. 이른바 ‘서울대 5·22 시위’는 그렇게 터졌다.

그런데 전투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열받은 도서관 학생들까지 합세하면서 이날 시위대는 순식간에 1000여명으로 불어났다. 당시 서울대 법대 신입생 박원순이 처음 시위에 참여했다 제적당하면서 인생이 바뀐 바로 그 시위다.

이날 채희완(현 부산대 교수)은 장만철(영화감독 장선우)·황성진·연성수·정해일·정성현·이지현 등 서울대 가면극연구회·탈춤반·문학회와 함께 김상진의 넋을 달래는 ‘지노귀굿’ 난장을 벌였다. 이들은 앞서 3월28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동아일보 사태’를 풍자한 ‘진동아굿’을 공연하기도 했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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