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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동아투위 저항 계속하자 ‘남산 분실’ 끌고가 / 이룰태림

등록 2014-03-24 19:06수정 2018-05-10 13:27

1975년 3월17일 쫓겨난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이 동아투위를 결성해 날마다 시위에 나서자 박정희 정권은 투위 위원 개개인을 직접 탄압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3월17일 새벽 동아일보사 편집국에서 언론인들의 양심선언 서약서를 받으며 함께 있던 제임스 시노트 신부가 구사대에 의해 끌려나오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75년 3월17일 쫓겨난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이 동아투위를 결성해 날마다 시위에 나서자 박정희 정권은 투위 위원 개개인을 직접 탄압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3월17일 새벽 동아일보사 편집국에서 언론인들의 양심선언 서약서를 받으며 함께 있던 제임스 시노트 신부가 구사대에 의해 끌려나오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58)
1975년 3월17일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된 언론인들이 흩어지지 않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해 날마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침묵 집회와 시위를 하고 언론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유인물을 제작해 각계에 배포하자, 박정희 정권은 갖은 방법으로 투위 위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경찰은 그해 4월3일 투위의 대변인을 맡고 있던 이부영 위원을 “유인물을 배포해 사회 불안을 조성했다”며 7일간 구류에 처했다. 한국의 언론탄압상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것에 대한 첫번째 경고였다. 곧이어 종로경찰서장은 동아투위의 아침 집회 시위를 접으라고 4월26일부터 5월15일까지 무려 16차례나 권영자 위원장에게 경고장을 전달했다. “귀회는 75년 3월17일 이후 현재까지 매일 8시30분부터 동아일보사 앞에 집결하여 통행인 및 출근하는 사우들에게 ‘동아 기자 해임은 경영주와 관권이 결탁한 언론탄압’이라는 유인물 등 40종을 제작 배포한 후 집단적으로 동아일보사를 출발하여 신문회관, 광화문 지하도, 조선일보사 앞을 거쳐 세종여관 등까지 시위행진을 반복해왔고, 관권 개입 또는 정부가 언론을 말살한다는 등의 유인물을 외국인에게 배포해왔습니다. 이러한 위법행위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는 바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동아투위는 4월29일 “우리들의 이 운동은 기자·프로듀서·아나운서 등 132명의 양심에서 우러난 자율적인 것으로 하늘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러운 바가 없다. 앞으로 당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작성될지도 모르는 자유언론실천운동 포기각서나 이와 비슷한 종류의 서약서 등은 여기 서명하는 우리들의 본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한갓 조작물로서 그것이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양심선언’을 작성해 위원 전원이 서명한 다음 제임스 시노트 신부에게 맡겼다. 시노트 신부는 바로 다음날 ‘인혁당 조작 사실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박 정권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추방되었다.

75년 6월18일 동아투위 대변인 이부영 위원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장면(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75년 6월18일 동아투위 대변인 이부영 위원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장면(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투위 위원과 언론인들에 대한 연행 조사와 구속도 잇따랐다. 4월24일에는 투위 위원이자 기자협회장 김병익을 비롯해 고 백기범·홍사덕·구월환·정추회·민병일·김영성, ‘조선투위’ 안성암 위원 등 기협 회장단 8명을 연행한 박 정권은, 기자협회가 국제신문인협회에 발송한 ‘언론탄압에 관한 특별보고서’와 국제기자연맹에 보낼 예정이던 ‘연차보고서’에 대해 “국가모독죄를 적용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들은 닷새 만에 풀려났으나, 전원 회장단에서 사퇴하는 바람에 기협이 마비되었다.

5월12일에는 동아투위의 서권석·박종만·김종철 위원이 폭력사범으로 구속되고, 고 안성열·고 김진홍·김동현 위원이 입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제작거부를 함께 했다가 회사로 복귀했던 <동아일보> 김영일 기자가 만취상태에서 밤늦게 세종여관의 투위 사무실로 찾아와 문짝을 발로 차는 등 술주정을 부리다, 이튿날 배포할 유인물을 등사하던 숙직조에 밀려 2층에서 계단으로 떨어진 것을 “집단폭행을 당했다”고 고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73년 여름 ‘신동아부’에 근무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가계도를 특집으로 다루겠다고 말하고 다니다가 사흘 동안 행방불명이 된 적이 있는데, 그는 당시 ‘○○공사’라는 곳에서 심하게 당하고 왔다고 했었다. 내게는 경북고 2년 선배이기도 한 그는 평소 기질상 투위에 참여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회사로 복귀했는데, ‘연행 공포 트라우마’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했다. 세 위원이 구속되자 나는 그의 개봉동 집으로 달려가 “고소를 취하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는 괴로워하면서 “좀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끝내 감감무소식이었다. 서권석·박종만 위원은 18일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김종철 위원은 1심 재판에서 벌금 7만원을 선고받았다.

6월2일에는 고준환 위원이 성북서에 끌려가 사흘 동안 불교학생회 관련 조사를 받고 풀려났고, 6월9일에는 이부영 위원이 ‘긴조 9호’로 구속되었으며, 6월19일에는 권도홍 위원(전 <여성동아> 부장)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재판받고 있던 한승헌 변호사를 위한 증인출석을 앞두고 중정에 연행되기도 했다. 앞서 얘기한 6월24일 ‘이대생 손수건 모금 사건’ 관련 이영록·이태호 위원의 연행과 16일 동안의 불법 구금도 있었다. 이렇게 되자, 원래 ‘부당해고 무효소송’을 위해 꾸려진 법조팀(권근술·고 김두식·오정환·고 김진홍·김동현 등)은 주임무가 연행·구속 사태에 대응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동아투위가 저항을 계속하자, 박 정권은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들었다. “동아투위 안에 빨갱이가 있다”고 몰아세운 것이다. 그 첫 그물에 걸려든 것은 이부영과 바로 나였다. 그해 6월25일 아침 동료 투위 위원들과 함께 동아일보사 정문 앞 침묵집회를 마치고 신문회관 쪽으로 행진하던 나는 중정 요원 4~5명에게 납치당하듯 체포되었다. 끌려간 곳은 그 악명 높은 ‘남산 분실’이었다. 곧 40대 남자가 나타나 “이곳에는 이부영과 정정봉(서울대 문리대 선배·사학과)도 잡혀와 있다. 당신을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수사하겠다”고 말했다. 이른바 ‘청우회(靑友會) 사건’이다. 필자/성유보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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