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투위는 1978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4돌을 맞아 제도언론이 은폐하는 민주화운동 소식 125건을 담은 ‘민주·인권 일지’를 펴내 필자(성유보)를 포함해 동아투위 위원 10명이 구속됐다. 사진은 79년 펴낸 <10·24 인권일지 사건의 변론 및 최후진술> 기록집.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66)
1977년 5월 제2기 안종필 위원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동아투위는 종교계·재야·지식인 그룹 민주화운동과의 연대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투위 자체의 언론활동도 모색했다.
마침 그해 12월 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도로 각계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인권운동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했는데, 동아투위도 가입했다. 안성열 위원이 조남기·조승혁 목사, 오태순 신부, 고 이우정 교수와 함께 5인 준비위원으로, 박종만 위원이 실무 준비팀으로 참여했다. 인권운동협의회는 78년 1월24일 25개 단체가 모여 발족했다. 동아투위의 정신적 지주인 고 송건호 선생이 부회장에, 안 위원이 총무에, 박 위원이 실행위원에, 문영희·임채정·김종철·정연주 위원과 최장학·신홍범 조선투위 위원이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인권운동협의회가 78년 2월27일 발표한 ‘우리의 인권현실’과 ‘한국 국민의 인권헌장’은 안성열·박종만·고 홍종민 위원 그리고 내가 문안을 기초했다.
이어 6월 초 동아투위는 조선투위·해직교수협의회(78년 3월 결성)·기독자교수협의회 등과 함께 ‘대학교수와 언론인들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했으며, 7월 초에는 반유신독재 연합전선인 ‘민주주의 국민연합’에 가입했다. 한국인권운동협의회·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동아투위·조선투위·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해직교수협의회·민주청년인권협의회·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양심범가족협의회·전국농민인권위원회·전국노동자인권협의회 등 12개 단체가 참여했다.
‘10·24 선언 4돌’을 맞은 동아투위는 비록 펜과 마이크를 빼앗겼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언론활동을 계속하기로 했다. 우선 명동 한일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고 천관우·송건호 선생을 모시고 ‘진정한 민주·민족 언론의 좌표’라는 성명과, 77년 10월부터 1년 사이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 일지’ 125건을 실은 유인물을 배포했다.
‘민주·민족 언론의 좌표’를 통해 투위는 이렇게 천명했다. “제도언론이 묵살해 버린 사건들은 너무나 많다. (…) 그래서 우리는 제도언론이 묵살한 125건의 사건들을 제목만이라도 국민들에게 알린다.”
박정희 유신독재는 이 기념식과 유인물을 문제 삼아 안 위원장·홍 총무·안성열·박종만 위원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했다. 동아투위는 즉각 장윤환 위원장 대리를 선출하고 11월3일에는 한국인권운동협의회·조선투위·해직교수협의회·기독자교수협의회·자실·백범사상연구소 등과 함께 ‘표현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자 경찰은 장 위원장 대리와 김종철 위원마저 구속해버렸다. 두 사람을 구속시킨 직접적인 꼬투리는 11월1일치 항의성명 때문이었는데, 성명 내용은 이러했다. “수색하라, 아무리 수색해 봐야 우리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있는 사실을 있다고 말한 진실, 당신들 스스로의 눈으로도 보고 듣는 진실밖에 없다. 연행하고 또 연행하라! 존재하는 진실과 정당한 논리는 안타깝게도 수갑으로 얽어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성명만으로는 구속이 어렵자 검찰은 “10·24 기념식 때 이규만 위원이 성명서를 낭독하는 것을 눈으로 따라 읽음으로써” 유신헌법을 비방했다는 ‘억지 죄’를 적용했다. 바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유신악법이었다.
6명의 위원이 감옥에 갔지만 투위는 고 이병주 위원장 대리를 뽑아 11월17일 또다시 항의성명을 발표했다. 경찰은 이번엔 정연주 위원을 구속했다. 투위는 다시 윤활식 위원장, 이기중 총무를 선출했고, 78년 12월27일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각계 인사들과 함께 200여명이 모여 송년모임을 하고 ‘동아투위 송년특집’도 제작해 배포했다.
이 특집에서 동아투위는 구속된 위원 7명의 공소장 내용과,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라는 제목으로 가족들이 전하는 위원들의 감옥살이 현황 및 각오, ‘자유언론은 영원한 실천과제’라는 성명서를 실었다. 그동안 대부분 ‘가리방’(등사판)으로 찍어 배포한 것과는 달리, 이 특집은 오프셋 인쇄물로 2000부나 찍어 각계에 배포했다. 오프셋 인쇄는 분도수도회의 고 하인리히 제바스티안 로틀러(임인덕)라는 독일인 신부의 도움으로 경북 왜관의 분도출판사가 맡아주었다.
그런데 이 송년특집 때문에 79년 1월 초 윤활식 위원장 대리, 이기중 총무와 함께 나는 두번째 구속됐다. 이로써 78년 10월부터 79년 초까지 무려 10명의 위원이 ‘긴조 9호’로 감옥에 갇힌 것이다. 이른바 ‘민권일지 사건’이다.
우리는 10명의 구속 사태를 ‘유신시대 언론자유가 총체적으로 감옥으로 간 사건’이라 불렀다. 투위는 이에 대응해 이부영 위원을 간사로 한 ‘법정투쟁 특별대책위’를 구성했고, 전국에서 22명의 변호사가 무료 변론에 나서주었다. 서울의 김재형·박세경·홍현욱·이돈명·태윤기·김춘봉·이범열·용남진·정춘용·이세중·김교창·조준희·박두환·이돈희·하경철·홍성우·황인철 변호사, 광주의 홍남순 변호사, 부산의 김광일·이흥록 변호사 등이 그들이었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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