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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30여년전 안종필이 꿈꾼 ‘새 시대 언론’ / 이룰태림

등록 2014-04-15 19:07수정 2018-05-10 13:38

‘민권일지 사건’으로 복역하던 중 암을 얻은 안종필 동아투위 위원장은 석방된 지 석달 만인 80년 2월 마지막날 끝내 회한의 삶을 마감했다. 사진은 3월4일 서울대병원에서 이해동 목사(오른쪽)의 집례로 진행중인 장례식 모습. <자유언론> 중에서
‘민권일지 사건’으로 복역하던 중 암을 얻은 안종필 동아투위 위원장은 석방된 지 석달 만인 80년 2월 마지막날 끝내 회한의 삶을 마감했다. 사진은 3월4일 서울대병원에서 이해동 목사(오른쪽)의 집례로 진행중인 장례식 모습. <자유언론> 중에서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74)
1979년 12월 ‘긴급조치 9호’로 수감됐던 동아투위 10명이 모두 풀려나온 기쁨도 잠시, 우리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받았다. 12월4일 풀려난 안종필 위원장이 석방 보름 만인 12월17일 간암 판정을 받고 원자력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75년 3월17일 우리가 <동아일보>에서 해직됐을 때부터 그는 “각종 출판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잃어버린 70년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출판해서 되도록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그는 해직 직후 경남고 동기 김용찬과 함께 출판계에 뛰어들어 <약학 사전>을 편찬하다 투위 위원장이 되는 바람에 출판의 꿈을 접었다. 동아투위 3년째에 접어든 77년 봄 그는 “이제 투위는 더이상 동아일보사 복직 문제에만 매달리지 말고 연대운동에 나서야 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우는 각계각층과 유대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후 홍종민 총무와 함께 조선투위·자유실천문인협의회·해직교수협의회 등과 여러 가지 연대운동을 벌였으며, 고 안성열·박종만·이부영 위원 등의 재야운동 참여를 적극 지원했다.

안 위원장은 80년 1월24일 퇴원해 집에서 요양하다 다시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지 하루 만인 2월29일 동아투위 위원 5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동아투위가 주관해 5일장으로 치른 ‘고 안종필 위원장 장례식’에는 재야인사, 야당 정치인들, 신부, 목사, 언론인, 문인, 학생운동권, 민주노조운동가, 농민운동가 등 1000여명이 문상을 했다.

안 위원장이 77년부터 다니던 한빛교회의 이해동 목사는 영결사에서 “그의 죽음은 분명 자연사가 아니라 그를 감옥에 처넣은 악의 세력에 의한 타살이옵니다. 그의 죽음이 순교였기에 그의 뜻이 우리 속에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느님이여 축복해 주소서!” 하고 기원했다. 고 문익환 목사는 “우리는 죽음으로 보여준 당신의 순수를 배반하지 못합니다. 민주와 자주와 진실의 고지를 점령하기까지, 그 고지에 정의의 깃발을 꽂기까지!”라고 애도했다. 함세웅 신부는 추도사에서 “선생님께서 쓴 언론은 붓으로 쓴 글씨가 아니라 당신의 몸과 피로써 쓴 역사의 기록입니다”라고 칭송했고, 조선투위의 정태기 위원장은 “안형이시여, 이 나라 민중의 앞길을 지켜주시고 이 나라 언론의 되어가는 길을 보우하시는 수호신이 되소서!”라고 빌었다. 고은 시인은 조시 ‘분합니다’에서 “자유를 부르짖는 자/ 자유를 죽음으로 지키는 자는/ 그 죽음으로 몸의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까/ 안종필 위원장/ 할 말이 산더미로 많습니다/ 당신 송장 앞에서 시비 걸고 싶습니다/ 그러나 분합니다/ 진정코 분합니다/ 제기럴/ 고이 가소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 안종필 위원장 가소서 가소서!”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 고 송건호 선생의 조사도 우리를 울렸다. “안형! 이게 꿈이 아닙니까? 형이 세상을 떠나다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언제나 미소 지으며 말하던 형의 얼굴, 안형~ 하고 부르면 웃으며 돌아볼 것 같은 형의 얼굴을 이제 영 대할 길 없게 됐으니 아무래도 꿈만 같습니다. 왜 안형만 먼저 떠나갔습니까? 5년간 같이 고생한 숱한 동료들을 남겨두고 왜 형만 혼자 떠나갔습니까?”

부인(이광자)과 아들(민영)·딸(예림) 그리고 수백명의 흐느낌 속에, 고 김관석 목사의 고별 기도와 박형규 목사의 축도를 끝으로, 안 위원장은 동아일보사 앞을 거쳐 일산의 공원묘지로 떠났다. 투위 동지들은 그의 마지막 말을 되새기면서 그 뒤를 따랐다. “동아투위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더없이 행복하다. 5년 가까이 온갖 고난을 치르면서 우리들은 형제 이상의 뜨거운 정을 느끼게 되었으며, 고생스럽지만 깊은 뜻과 보람을 느낀다. 우리 시대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동아투위가 5년이나 버텨온 것은 기적이며, 하늘의 축복이다.”

나는 고 안종필 위원장에게 이 기회를 빌려 다음과 같이 보고드린다. “당신께서 살아생전에 보셨던 ‘동아투위 5년간의 기적’이 내년이면 ‘40년의 기적’이 됩니다. 동아투위는 당신을 기려 87년 ‘안종필 자유언론상’을 제정해 해마다 언론인과 언론사에 시상해 오고 있습니다. 94년부터는 동아투위의 ‘10·24 기념식’을 한국언론노조·기자협회·피디연합회가 공동으로 열고 있으며, ‘통일언론상’도 같은 날 시상하고 있습니다. 안종필 위원장님, 당신은 한국 언론계의 모세입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안종필은 오늘날에도 언론자유의 정신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 있다. 고인은 성동구치소 시절 이런 말을 남겼다. “새 시대가 와서 우리가 언론계에서 다시 일할 수 있게 될 때, 신문은 어떻게 만들고, 경영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가로쓰기에 한글전용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신문은 너무 식자층 중심으로 제작되고 있는데, 민주를 위한 진정한 신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전용을 해야 돼. 편집도 지금처럼 정치·경제·사회·문화 이런 식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종합편집을 해야 해. 새 시대가 오면, 국민들이 골고루 출자해서 그들이 주인이 되는 신문사를 세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해. 그렇게 되면 편집권은 독립될 수 있어.” 그의 꿈은 사후 8년 만에 거짓말처럼 현실이 됐다. 바로 88년 창간해 오늘날까지 굳건히 버티고 있는 <한겨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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