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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민청련, 1980년대 민주화운동 ‘연대’의 고리 / 이룰태림

등록 2014-04-29 19:12수정 2018-05-10 13:46

1983년 9월 출범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은 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에 정면으로 맞서며 학생운동과 기성세대의 연대를 끌어내는 성과를 이뤘다. 사진은 85년 5월17일 민청련 회원들이 광주 시내에서 ‘5월광주민중항쟁 기념 시민대회’ 펼칠막을 든 채 거리시위를 하는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83년 9월 출범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은 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에 정면으로 맞서며 학생운동과 기성세대의 연대를 끌어내는 성과를 이뤘다. 사진은 85년 5월17일 민청련 회원들이 광주 시내에서 ‘5월광주민중항쟁 기념 시민대회’ 펼칠막을 든 채 거리시위를 하는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84)
‘민주화운동청년연합’. 태어난 지 30년이 더 흘렀고, 해산한 지도 22년이 지난 ‘민청련’을 생각하면, 내 가슴엔 지금도 아련한 그리움과 슬픔이 교차한다. 왜일까? 그들이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우리들에게 선물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공포정치 속에서 3년 남짓 숨죽이고 있던 지식인 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의 깃발을 다시 힘차게 휘날리며 조직운동에 가장 먼저 나선 그룹은 70년대 학생운동 출신 청년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목숨 걸고 민청련을 만들었음을 안다. 민청련의 상징인 ‘독을 품은 두꺼비’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두꺼비 상징은 서울대 문화패 출신의 연성수와 홍대 미대 출신 이기연의 합작품이었다.

“민청련은 처음부터 깨지려고 만든 조직이었다”고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게 깨지더라도, 그냥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알을 잔뜩 품고 뱀에게 잡아먹혀 그 독으로 뱀을 죽게 하고 민주주의라는 알들이 뱀을 자양분으로 해서 이 땅에 새 생명을 얻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말한 “사즉생(死卽生) 생즉사(生卽死)”의 심경으로 읽힌다.

1983년 9월 출범한 ‘민청련’은 발기 취지문에서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오늘의 현실상황은 뿔뿔이 흩어진 민주청년들이 다시 한데 모여 민중운동의 흐름 속에서 양심적인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 노동자, 농민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회 건설에 온몸으로 매진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창립 선언문에서는 “고통과 희망을 한 몸에 안고 억압받는 제3세계 민중의 일원으로서, 민족사의 전진에 앞장서야 할 청년으로서, 민주 통일을 위한 민주정치의 확립, 민족자립경제의 확립, 자생적이고 창조적인 문화교육체계의 형성, 냉전체제 해소와 핵전쟁 방지를 위해 매진한다”고 밝혔다. 초대 의장에는 김근태, 부의장에 장영달,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최민화, 부위원장에 이해찬이 선출되었다.

내가 ‘민청련’을 주목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때까지 학생운동이 재학 중에 그치고 졸업하고 나면 대부분 현장에서 멀어져 가는 데 반해 직업적 민주화운동가들과 이들을 지원할 단체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이들이 민주화운동에 목숨까지 걸었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청년층이 선두에 나섬으로써 학생운동과 기성세대의 연결이 가능해졌다.

“민청련이 대표를 선정하는 데 가장 중요하게 염두에 둔 것은 노동운동 등 기층 민중운동 현장과의 유기적 연계성이었다. 노동운동 등의 언더조직과 연계가 안 되면 대중적 기반을 갖지 못한다고 판단했다.”(권형택·한영수,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깃발을 높이 들자’, <6월항쟁을 기록하다>(제2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여기서 엿볼 수 있듯, 민청련은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이 기층 민중운동과도 좀더 폭넓은 소통과 연대를 할 수 있게 된 고리였다.

민청련 세대들은 기존의 기성 지식인 민주화운동가들과는 달리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분단극복운동과 병행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보고, ‘민중·민주·민족’을 하나의 운동으로 연결하려는 새로운 운동노선을 채택했다. 더불어 이들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투쟁성 회복, 청년세대의 내부 역량 체계화, 다른 민주화운동 세력과의 연대, 대중운동 참여와 지원, 한국 민주화운동의 진로 모색과 방법 개발을 위한 조사·연구 활동을 과제로 설정했다. 출범 6개월 만인 84년 3월 기관지 <민주화의 길>도 창간해 해산 때까지 8년간 19호나 발간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민청련은 출범 초기부터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냉전 강요와 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어 첫 대중 투쟁으로 83년 11월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 반대운동에 나섰다. 민청련은 한국기독청년협의회(KSCF)와 함께 발표한 ‘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라는 성명에서 “미국과 소련의 신냉전은 한반도에서 긴장을 고조시키고 민족의 전멸을 가져올 전쟁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며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은 우리의 민주화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독재권력의 지원을 위한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84년 5월19일에는 광주에서 광주민중항쟁 희생자 추도식과 거리시위를 한 데 이어 85년 여름까지 ‘군사독재의 국가폭력 추방을 위한 투쟁’과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연대 투쟁’, ‘노동법 개정 투쟁’, ‘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전두환 방일 저지 투쟁’, ‘노동자 블랙리스트 철폐운동’, ‘전두환 방미 반대 투쟁’ 등을 줄기차게 전개했다.

그 무렵 문학·예술·문화·출판·교육 등 여러 분야의 지식인들이 각각 민주화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나선 것도 민청련의 기세에 자극받은 덕분이었다. 동아투위, 조선투위, 80년해직기자협의회의 해직기자들도 84년 봄부터 사회과학 출판인들과 민주화운동 단체 결성에 본격 착수했다. 그 결단도 민청련의 등장에 힘입은 바 크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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