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철 사회부장
드라마 <포청천>의 잔상이 너무 오래 남은 탓일까? 그저 불호령 한마디면 자진출석에 이실직고까지 일사천리일 줄 알았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세월호 사건의 주범이자 배후라는 전직 회장은 증발해버렸다.
검찰은 그의 소재를 모른다. 수사 초기부터 검찰은 그가 금수원에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거기에 그는 없었다. 체면 구긴 검찰이 “유병언씨가 검찰 또는 법원에 자진 출석하지 않을 경우 언제까지라도, 대한민국 어디까지라도,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끝까지 추적·검거해서 본래의 죄질과 도망했다는 나쁜 정상이 함께 가중된 법정 최고형의 심판을 받도록 할 것”이라고 자못 비장한 ‘월권성 경고’까지 띄웠지만, 효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이 엄포도 벌써 한 달이나 된 일이다.
검찰은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불과 닷새 만에 유씨를 ‘총책임자’로 지목하고 호기롭게 공개수사에 나섰다. 검찰이 당시 어떤 처지였는지는 “압수수색에서 뭔가 나와야 하는데”라거나 “‘돼지머리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내부자들의 말에 함축돼 있다. 물론 생때같은 아이들을 눈앞에서 수장시킨 정부의 책임을 덜어 보겠다는 얄팍한 셈법이 없었을 리 만무하지만, 책임의 소재를 가려야 한다는 엄중한 당위는 애당초 시빗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의 효과와 정당성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수사 개시와 동시에 언론은 출처를 가늠하고도 남을 기사들로 유씨 일가를 ‘폭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씨가 일단은 도망하고 잡히면 부인하며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백’(back)이라도 동원하라는 음습한 세계의 불문율-이른바 ‘일도·이부·삼백’-을 따르지 않았다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을 것도 같다. 쾌도난마를 기대했던 수사가 진퇴유곡에 빠져든 까닭은 ‘밀행성’이라는, 수사학 1장 1절을 검찰 스스로 무시한 자업자득인 셈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수사 과정에서 공공연히 이뤄진 원칙의 훼손이다. 형법은 기소 전 피의사실 공표를 엄격히 금하고 있으나, 현실은 딴판이었다. 유씨의 영장에 적힌 ‘범죄사실’ 말고도 검찰이 아니고선 파악할 수 없는 내용들이 예사로 대서특필됐다. 가령 순천 별장에서 채취된 디엔에이(DNA)가 유씨의 것과 일치한다는 보도는 검찰의 확인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기사다. 검찰은 멀쩡한 피의사실공표죄를 지우고 뭉갰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게 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언행 또한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세 차례나 유씨 검거를 공식 언급했다. 이쯤 되면 당부가 아니라 수사지휘다. 더욱이 10일 국무회의에서는 “유병언 일가가 회생절차의 허점을 악용해서 2천억원에 이르는 부채를 탕감받고, 다시 회사를 인수해서 탐욕스럽게 사익을 추구하다 결국 참사를 낸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일갈했다. 일개 사건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할 만큼 각의가 여유로운 모임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사법 절차가 개시되기도 전에 ‘유사 판결문’을 쓰는 게 대통령의 직무가 아니라는 것쯤은 상식에 속한다.
게다가 대통령의 발언은 헌법으로 보장한 ‘무죄추정 원칙’에도 어긋난다. 그는 취임식에서 “헌법을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서”했었다.
이 ‘비정상적’ 드라마가 얼마를 끌든 그 결말을 점칠 재간은 없으나, 반상회 홍보 신이나 ‘수사팀에 홍삼 두 박스 하사’ 따위 지문으로 막간 코미디를 연출하는 검찰의 모습은 보기에 딱하다. “수사는 결과뿐만 아니라 절차와 과정까지도 항상 정의로워야 한다”며 “형사사법의 프로페셔널이 되자”던 김진태 총장의 취임 일성도 유씨와 함께 종적이 묘연하다. 머지않아 포청천의 나라에서 만들었다는 ‘검사 종신 책임제’도 수입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강희철 사회부장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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