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의 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새노조) 소속 조합원들이 5일 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방송 본관 앞에서 열린 파업승리 보고대회에서 길환영 사장 해임 제청안의 이사회 가결에 환호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길환영 <한국방송>(KBS) 사장이 청와대 외압 논란 속에 해임된 가운데, 한국방송 사장 선임 방식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길 사장 퇴진 운동을 벌였던 양대 노조는 특별다수제 도입과 사장추천위원회(사추위) 구성 관철을 위해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한국방송 이사회는 25일 오후 회의를 열어 야당 추천 이사들이 제안한 특별다수제 도입과 사추위 구성 방안을 다뤘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사회는 오는 30일 임시 이사회를 열어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앞서 이사회는 지난 18일 회의에서 “23~30일 사장 후보를 공모하겠다”고 의결한 바 있다. 특별다수제는 사장 선임의 경우 단순 과반 의결이 아니라 일부 야당 추천 이사의 동의를 추가로 받아 의결하도록 하자는 것이고, 사추위는 여야 정치권과 시민단체, 노조 등의 추천을 받은 위원들이 새 사장 후보를 골라 이사회에 추천하는 방안이다.
사장 선임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지금의 ‘공모-이사회 과반 의결’ 방식으로 새 사장이 뽑히면 ‘제2의 길환영 사장’이 선임될 것이라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정책위원은 “현재 이사회는 7 대 4 구조로 여당 쪽이 사실상 결정권을 쥐고 있다. 이런 의결 구조 아래선 청와대의 외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방송 양대 노조는 이날 천막농성 시작에 앞서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권오훈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방송본부(새노조) 위원장은 “특별다수제는 청와대의 사장 낙점을 막는 제도다. 사추위는 후보를 검증할 수 있는 제도다. 어느 하나 양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보수 진영에서도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다. <조선일보>는 지난 6일치 신문 사설에서 “케이비에스를 공영방송으로 유지하고 싶다면 정치권이 사장 임명을 좌지우지하고 편집과 보도에 개입하려는 풍토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다. 방송법은 사장 해임 뒤 30일 이내에 후임 사장을 선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남은 시간은 보름 남짓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이사회의 여당 추천 이사들이 부정적이다. 이날 이사회에서도 “특별다수제는 위법 소지가 있다”, “사추위는 이사회 의결권을 침해할 수 있다”며 반대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방송 구성원들은 사추위 구성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사추위는 실제 두차례 운영된 적이 있다. 2006년 정연주 사장 때 처음 도입됐으나 후보를 몇명 추천할지를 놓고 이사회와 갈등을 빚다 무산된 적이 있다. 2009년 김인규 사장은 사장추천위원회로부터 추천을 받아 임명됐다. 물론 사추위에는 그에 걸맞은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2009년 당시 사추위에 참가했던 한 인사는 “사장 후보 5명을 추천해 이사회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 사추위가 1명의 후보를 이사회에 추천할 수 있도록 요구했으나 이사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이번에 사추위가 구성된다면 최대한 소수의 후보를 이사회에 추천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의 공영방송도 정치권의 입김에서 벗어나 국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한다는 사추위 제도의 취지를 여러 형태로 실현하고 있다. 영국 <비비시>(BBC)는 기존 경영위원회를 대신해 각 지역을 대표하고 전문성 검증을 거친 12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감독위원회에서 사장을 선출하고, 독일 <체트데에프>(ZDF)는 노동·지역·종교 등을 대표하는 77명으로 이뤄진 방송위원회에서 사장을 뽑는다. 일본의 <엔에이치케이>(NHK)의 경우 실제 경영을 하는 이사회가 아닌 별도의 경영위원회에서 사장을 뽑는다. 12명의 경영위원회 위원 가운데 8명이 지역 대표일 정도로 탈정치적이다. 케이비에스처럼 순전히 여야 추천으로 이뤄진 이사들이 사장을 뽑는 경우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닌 셈이다. 김성해 대구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사장 선출에 반영될 수 있어야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별다수제는 현행 방송법에 ‘재적이사 과반 찬성으로 의결’이라는 규정이 있어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이사회 정관을 손보면 된다고 하지만, 이도 방송통신위원회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이정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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