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경찰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으로 추정되는 변사체와 유류품을 전남 순천의 한 장례식장에서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서울분원으로 옮기기 위해 구급차에 옮겨 싣고 있다. 순천/연합뉴스
‘20억 현금 가방’ ‘독사 물려 사망’ 등 추측 보도 쏟아내
내일 ‘세월호 참사’ 100일…‘진상 규명’에 더 큰 관심을
내일 ‘세월호 참사’ 100일…‘진상 규명’에 더 큰 관심을
경찰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망을 발표한 뒤 갖가지 음모론이 끊이지 않고 유포되고 있다. 음모론이 확산되는 데는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채 추측성 보도를 쏟아내는 언론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내일이면 100일이 되는 ‘세월호 침몰’의 진상 규명에 대한 관심이 가려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① 20억원의 도피 자금? 순천경찰서는 22일 브리핑에서 “외견상 타살 흔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20억원 가량의 도피 자금이 든 가방이 주검이 있던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 타살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누군가 거액을 빼돌리기 위해 유 전 회장을 살해했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20억 도피 자금설’은 지난 7월 검찰로부터 나온 얘기다. 검찰이 5월 초 순천에서 유 전 회장을 만나 땅을 팔았다는 ㄱ씨를 조사한 결과, ㄱ씨가 ‘유 전 회장이 가방에서 현금 2억5000만원을 꺼내 땅값을 지불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당시 언론은 검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유 전 회장이 돈을 꺼낸 여행용 가방이 사과 상자 2개 크기였다며 이 안에 돈을 가득 채우면 20억원가량 들어 있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20억원은 검찰의 계좌 추적 등을 통해 실체를 확인된 것이 아니라 추측인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언론은 ‘20억원’이 실재하는 양 ‘도피 자금’으로 단정해 보도하고 있다. 또 유 전 회장의 주검이 발견된 현장에서 20억원이 든 여행용 가방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타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또 ㄱ씨가 유 전 회장을 만났다고 밝힌 5월 초는 경찰과 검찰이 그를 지명수배하기 전이다. 검찰의 급습을 받고 도주하던 상황과는 여로모로 유 전 회장의 차림이나 소지품이 다를 수밖에 없다. 또 도피중인 고령의 노인이 사과 상자 2개 크기의 여행용 가방을 들고 다녔다는 점도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20억원 도피자금 가방’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② 유 전 회장은 정말 술을 안 마실까? 일부에서는 주검이 발견된 현장에서 막걸리 병 1개와 소주 병 2개가 함께 나온 점을 들어 유 전 회장의 사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유 전 회장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유 전 회장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이태종 기독교복음침례회 평신도복음선교회 임시 대변인의 말뿐이다. 유 전 회장이 사실상의 교주 역할을 해온 구원파 내부에서 유 전 회장이 교리로 금지하고 있는 음주를 했다는 증언이 나올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일부 언론은 이를 기정사실화해 현장에서 발견된 술병을 의혹의 근거로 제시한다.
③ ‘와시바’가 ‘명품 신발’’? 언론의 선정적 보도 행태는 유 전 회장의 주검과 함께 발견된 유류품에서 정점에 달했다. 언론은 순천경찰서가 점퍼의 브랜드라고 밝힌 ‘로로피아나’가 점퍼의 경우 1000만원에 이르며, 정장의 경우 세계 5대정장으로 꼽히는 명품이라고 소개했다. 한 방송사는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로로피아나 매장의 모습을 화면에 담기도 했다.
또 ‘와시바’라는 신발 역시 고가의 명품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일부 누리꾼들이 그런 브랜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문을 제기했고, 실제 순천경찰서는 22일 밤 “신발 waschbar는 제품명이 아닌 독일어 ‘세탁할 수 있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발견된 신발은 상태가 낡아 제품명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정정했다.
누리꾼들이 발음과 철자가 유사한 신발 브랜드를 찾아 “와시바라는 브랜드가 실재한다”는 글을 올리자 일부 인터넷매체는 ‘단독’이라며 누리꾼들의 패러디를 그대로 보도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④유병언이 ‘세월호 참사’ 책임의 정점? 가장 큰 문제는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로 ‘세월호 참사’의 본질이 가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세월호 참사 100일을 하루 앞둔 23일 종편은 하루종일 유 전 회장의 사망과 관련한 보도를 내보내고 있다. 또 한 통신사는 “세월호 책임의 정점에 있는 유 전 회장이 사망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유 전 회장의 사망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과는 별개다. 희생자 가족들은 사고 이후 줄곧 유 전 회장의 검거보다 진상 규명의 주춧돌이 될 ‘세월호 특별법’ 통과를 바라고 있다. 유 전 회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22일 진도에 남은 실종자 가족들도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유 전 회장의 사망보다 세월호 특별법 통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트위터 이용자 @eyoung****는 “자잘한 문제는 언젠가는 밝혀지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세월호 특별법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에 함몰될까 두렵다”고 지적했다.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에 대한 조롱도 나오고 있다. 트위터 이용자 @Santa****는 한 언론이 유 전 회장이 독사에 물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한 것과 관련해 “듣다 듣다 별 해괴망칙한 가설을? 탐정 소설가의 전문 영역을 침범 하지마라. 제발!”이라고 적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세월호 100일, 고장난 저울 [한겨레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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