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월 자유언론실천선언 발표는, 자유언론 운동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언론사의 한 장을 장식한 사건이었다. 유신헌법 개헌(1972년) 등 영구집권 체제 구축에 열을 올리며 언론에 재갈을 물렸던 박정희 정권은 5년 뒤 궁정동의 총성과 함께 무너졌다.
선언의 씨앗은 몇 년 전에 뿌려졌다. 박 정권이 긴급조치 등을 통해 언론을 장악하려 하자, 1971년 <동아일보>를 필두로 전국 14개 언론사가 ‘언론자유수호선언’를 내놨다. 중앙정보부는 언론탄압을 노골화했다.
정보부가 언론사 간부들을 끌고가면서 사태는 급진전됐다. 1974년 10월23일 ‘서울대 농대생 300명 데모’ 기사와 관련해 동아일보의 송건호 편집국장 등 3명이 연행된 것이다. 같은날 베트남 전쟁 소식을 전한 <한국일보>도 장강재 사장 등이 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동아일보사 소속 기자·피디 200여명은 다음날인 24일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민주사회 유지와 자유국가 발전을 위해 자유언론은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면서, 기관원의 언론사 출입과 언론인 불법연행 중단 등을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 전국 35개 신문, 방송, 통신사의 기자들이 선언에 동참했다. 박 정권은 이에 광고주를 협박해 동아에 광고를 싣지 말도록 했고, 이른바 ‘백지 광고 사태’가 벌어졌다. 이듬해 동아 134명, 조선 32명의 기자가 쫓겨났다.
기자들은 해직됐지만 자유언론 운동은 외려 더 크게 타올랐다. 해직 기자들은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했고, 이듬해 <말>을 창간했다. 1988년 <한겨레> 창간의 밑돌이 되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은 기자들이 직접 저항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이다. 한겨레 등 새로운 언론이 시작된 날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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