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와이티엔 사옥 뉴스전광판 앞에 선 노 전 앵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 노종면 전 YTN 앵커 인터뷰
YTN 해고에 이어 국민TV 홀연히 떠난 뒤
9개월여 침묵 깨고 털어놓는 언론 이야기
YTN 해고에 이어 국민TV 홀연히 떠난 뒤
9개월여 침묵 깨고 털어놓는 언론 이야기
노종면 전 <와이티엔>(YTN) 앵커는 2008년 10월7일 해고됐다. 벌써 7년 전 일이다. 노조위원장으로서 이명박 정부의 ‘낙하산 사장 반대투쟁’을 이끌다 벌어진 일이다. 박근혜 정부 산하 국민대통합위원회는 정권 초기 언론인 해직자 문제 해결에 나섰지만 주무부처의 반대로 지금은 포기한 상태다. 1994년 와이티엔 기자로 입사해 간판 뉴스인 ‘뉴스창’을 진행하며 스타 앵커로 떠오르고, ‘돌발영상’을 기획하며 스타 피디로도 발돋움했던 그는 자리를 잃고 7년째 언론계를 배회하고 있다. 노 전 앵커의 7년은 위태롭게 흔들리는 한국 언론자유의 행적 그 자체다. 한때 인터넷 대안방송 <국민티브이(TV)>에서 방송제작국장을 맡아 ‘뉴스케이(K)’를 진행하기도 했지만, 지난해 12월 말 돌연 사퇴한 뒤 최근까지 두문불출해왔다. “갈등을 더 일으키고 싶지 않다”며 발언도 자제했다. <한겨레>는 지난 8일 노 전 앵커를 만나 그의 근황과 고민을 들었다. 부침을 겪고 있는 대안언론 운동에서 얻어야 할 교훈도 물어보았다. 지난해 말 대법원의 와이티엔 해고 확정 판결 이후 그가 언론과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 지난 2일 밤 서울 상암동 <와이티엔> 사옥 인근 주점에서는 와이티엔 신임 기자협회장 당선 행사가 있었습니다. 해직자였던 정유신 기자가 지난해 복직해 새 기자협회장이 된 것입니다. 이 자리에 노종면 전 앵커도 함께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직을 못해 여전히 해직자 신분입니다. 이날 술자리에서 한 와이티엔 기자는 “노종면은 100명분의 일을 혼자 해내는 사람인데…” 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노 전 앵커는 언제쯤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해직된 지 벌써 7년째입니다.
8일 오후 2시. 노종면(48) 전 <와이티엔>(YTN) 앵커가 서울 상암동 와이티엔 신사옥 앞에 섰다. 숭례문 인근에 있던 사옥이 지난해 상암동으로 옮아왔다. 말끔한 옷차림과 정리된 머리칼은 여전히 앵커다운 모습이다. 피부가 검게 탄 그가 1층 안내데스크로 걸어갔다.
“출입증 좀….” 노 전 앵커는 경비 직원에게 신분증을 맡겼다. 직원이 그에게 작은 플라스틱 카드를 건넸다. ‘방문’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이제 와이티엔 직원이 아니라 방문객 신분으로 회사를 드나든다. 사내외에서 알아보는 와이티엔 스타 앵커였지만 현실의 벽은 차갑다. 와이티엔 해직자의 신분.
“쫄면! 어디 갔다 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노조 사무실이 있는 6층에 내리자 선배로 보이는 남성이 말을 건넸다. ‘쫄면’은 노종면 전 앵커의 별명이다. 친한 사람들만이 그렇게 부른다. 노 전 앵커는 이 별명을 좋아한다. 쫄면을 실제로 좋아하거니와 ‘질긴 면발’이 마치 ‘질기게 버티고 있는’ 자신과 닮은 듯해서다.
노 전 앵커는 2008년 8월까지 와이티엔의 간판 뉴스인 ‘뉴스창’을 저녁 7시부터 8시30분까지 진행했다. 날것 그대로의 현장에서 사회 갈등을 조명하는 독특한 포맷의 ‘돌발영상’을 만들어낸 피디이기도 하다. 돌발영상은 와이티엔을 그저 그런 평범한 케이블방송에서 색깔있는 보도채널로 시청자에게 각인시키는 촉매제였다. 노종면은 2003년 12월 돌발영상 제작 공로로 ‘올해의 와이티엔 대상’을 받았다.
그러나 5년 뒤인 2008년 10월7일 노종면은 와이티엔에서 해고당했다. 와이티엔을 살린 영웅에서 미운 오리 새끼로 전락했다. 2008년 노조위원장을 맡으며 노조 쟁의를 이끈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와 함께 우장균, 권석재, 정유신, 조승호, 현덕수 등 총 6명의 와이티엔 직원이 해고됐다. 2014년 11월27일 대법원은 노종면, 조승호, 현덕수의 해고는 인정하고 우장균, 권석재, 정유신 등 3명의 해고만 무효라고 판결했다. 노 전 앵커는 정치적인 해법이 없다면 사실상 회사 복귀가 힘들어졌다.
노 전 앵커는 복직싸움을 계속하면서 대안방송의 산파역을 해왔다. 2012년 1월부터 6월까지 대안방송 <뉴스타파>의 진행을 맡았고 2013년 9월부터는 인터넷방송 <국민티브이>의 ‘뉴스바’ 진행을 시작했다. 이어 국민티브이 개국단장을 맡고 지난해 4월부터 간판 뉴스인 ‘뉴스케이’를 진행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말 홀연 국민티브이를 떠났다. 그를 응원하던 사람들은 잠적의 이유를 궁금해했지만 그는 침묵해왔다.
노 전 앵커를 오랜 설득 끝에 만났다. 그를 만나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해고가 벌써 7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와 공정언론의 구실을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 모두가 ‘해직자 노종면’과 함께 7년의 해직 기간을 보낸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공정언론을 외치다 해직당한 채 살 것인가. 인터넷 기반의 대안방송은 성공할 수 있을까. 그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노 전 앵커와의 인터뷰는 8일 오후 서울 상암동 와이티엔 노조사무실에서 4시간여 진행됐다. 그의 언론 인터뷰는 지난해 대법원의 해고 확정 판결 이후 처음이다.
2008년 노조쟁의 이끌다 해고 뒤
복직싸움 하며 대안방송 산파역
뉴스타파 이어 국민티브이에서
뉴스케이 진행하다 돌연 사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뉴스케이 앱 배포’ 경영진과 이견
서영석 이사장 프로진행에 문제제기
침묵하는 이사회도 견딜 수 없었다
“민주주의 감시하는 조직일수록
더 민주적이고 공개적이어야” “사표 쓰고 전화번호 바꿨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원래 살던 곳이 인천이었는데 몇달 전 경기도 양평으로 이사했다. 국민티브이 그만두고 머리도 좀 식히고 싶고 아이들을 공기 좋은 곳에서 살게 하고 싶었다. 조그맣게 텃밭 가꾸며 살고 있다. 상추, 오이, 부추, 고추, 쑥갓, 호박을 키운다. 나는 농사 방법 정도 알려주며 지시하고 애들(고등학생 딸)이 심는다.”(웃음) -국민티브이 그만두고 아무 일도 안 하는데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나? “내가 와이티엔 해직기자라서 와이티엔 노동조합에서 상당액을 보전해주고 있다.” -생활고는 피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목소리가 작아짐) 그래서 다른 부문의 해고자들 삶과는 비교할 수 없다.” -노종면을 포털에서 검색해 보면 연관 검색어로 요즘 뭐가 나오는지 아나? “뭐가 나오나?” -‘노종면 국민티브이 사퇴’, ‘노종면 사표’ 이런 것들이 와이티엔보다 먼저 나온다. 대중의 관심사라서 국민티브이 문제는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해한다.” -국민티브이 그만두고 연락은 왜 두절된 건가? “나를 지지해주는 후배들과 조합원들에게 내가 돌아올 수도 있다는 희망고문을 주는 게 싫었다. 분명하게 관두겠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싶어서 전화번호도 바꾸고 모든 접촉 창구를 막아버렸다.” 수면 아래 가라앉았던 국민티브이 내부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지난 5월부터다. 국민티브이 보도국과 제작국 일부 직원이 조직 개편과 인사 문제 등의 사안을 담은 대자보를 게시했다가 강제 철거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7월에는 프리랜서의 노동조합 참여자격 문제를 놓고 사쪽과 노조가 충돌했다. 사쪽은 7월20일 노조의 대자보 부착과 관련해 징계를 시작했고 노조는 22일부터 제작 거부에 들어가 갈등이 커져갔다. 국민티브이 정상화를 위해 공동대책위원회가 발족하는 등 여러 중재 노력 끝에 지난달 29일 국민티브이는 임시총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서영석 이사장은 사퇴하고 현상윤 전 한국방송 피디가 새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노조와 갈등을 빚던 조상운 사무국장(국민일보 해직기자)은 지난달 27일 라디오제작팀장으로 인사이동됐다가 지난 8일부터는 뉴미디어국 인터넷뉴스팀 기자로 발령받았다. 노조는 7일부터 업무에 복귀했다. 국민티브이는 18대 대선 직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만든 대안 인터넷방송사다. 지난해 4월1일 당시 2만3187명이 38억6295만원을 출자해 웹기반 티브이 방송을 시작했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국민의 성금으로 한겨레신문사가 태동했듯 국민티브이도 유사한 과정을 거쳐 출범한 것이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이 초대 이사장으로 참여했고,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의 김용민 피디와 노종면 전 와이티엔 앵커가 실무진으로 합류해 관심을 모았다. 국민티브이가 대안 언론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을지 주목받았기에 최근의 내부 갈등은 적잖은 관심을 끌어왔다. 노 전 앵커에게 인터뷰 의사를 물어본 것은 국민티브이 노사 갈등이 심화되던 올해 봄부터다. 국민티브이 노사 갈등의 한 축에 그의 사퇴가 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며 한사코 사양했다. “설사 입장을 밝히더라도 국민티브이 조합 내부에서 밝힐 것”이라며 거듭 인터뷰를 고사했다. 이달 초 그를 다시 설득했다. 그는 국민티브이 문제를 최소한의 수준에서만 언급하기로 하고 인터뷰에 응했다.
“(국민티브이에서) 싸우기 싫었다”
-대체 왜 그렇게 갑자기 그만둔 건가. 좀 무책임하지 않나?
“조합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나 하나만 그냥 빠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경영진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다수였다. 물론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마련하는 그런 것도 가능했겠지만 내가 그만두기로 결심한 때는 이미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저쪽이) 실력행사를 해버린 상황이라서 내가 안에서 싸우느냐 따르느냐 두 선택지만 남았었다. 싸우기 싫었다. 물론 내가 나가버리면 운영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고 밑바닥 속마음으로는 ‘그래, 나 없이 잘해봐라’ 이런 게 없진 않았다. 그래도 김용민과 조상운이 뜻만 맞으면 그런대로 잘 운영할 거라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갈등이 있었나?
“나는 뉴스케이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생각했고 한쪽에선 (라디오국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놓고 이견이 있었다. 경영진은 뉴스케이로는 조합원 수를 확장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뉴스케이가 시청률이 안 나오니까 경영진으로서는 축소 검토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뉴스케이가 데일리 뉴스로서 실패했다고 생각하진 않나?
“(좀 망설이다가) 경영진은 그렇게 주장하던데 나는 뉴스케이의 플랫폼이 문제였다고 본다. 초기에 생방송을 할 때는 다운로드 수가 회당 10만~20만명 나오더라. 그러다 7~8월께 10만 이하로 떨어졌다. 인터넷 환경에서 45분짜리 티브이 뉴스를 통째로 보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이 나왔다. 그래서 뉴스 앱을 배포해 시청자가 보도 하나하나를 끊어서 볼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런 시도까지 다 해보고 나서 뉴스케이를 냉정하게 평가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영진에게 안 받아들여졌다. 인건비로 한달 1억원을 쓰는 회사가 천만원 정도 개발 비용이 드는 앱 하나를 안 만든다는 것은 더이상 뉴스케이에 투자 못 하겠다는 뜻으로 비쳤다.”
이에 대해 서영석 미디어협동조합 전 이사장은 지난 1월 팟캐스트 방송 <새가 날아든다>에 출연해 “앱을 만들어 우리가 팟빵에 있던 국민티브이 트래픽을 가져오면 추가적인 트래픽 예산을 감당해야 했다. 혹자는 월 5천만원이 더 들 거라고 했다. 예산이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외부에선 친노 성향의 서영석 이사장과의 갈등 때문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서 이사장이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형식상 문제라는 지적도 내부에서 나왔던 것으로 아는데.
“(서 이사장의) 친노 성향 이런 거는 내게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언론사 이사장이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은 문제라고 봤고 그것을 문제제기한 사람이 나다. 원칙적으로는 서 이사장이 내 의견에 동의는 했는데 다만 기왕에 진행을 하고 있는 거니까 이해해 달라는 입장이었다. 서 이사장의 발언도 어처구니없었지만 침묵하는 경영위원회 분위기를 더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부분은 기사로 쓰지 않았으면 한다.”
-왜?
“국민티브이에 있을 때는 침묵하다가 서영석 이사장이 교체된 다음 말하는 게 뭔가 힘이 약해진 사람을 상대로 공격하는 것처럼 비칠까봐 부담스럽다. 이제 국민티브이가 정상화되고 있는 만큼 비판 발언은 삼가고 싶다.”
-대안방송을 만들 때 겪었던 진통들을 공유해야 반면교사로 삼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궁금해하시는 분들께는 참 죄송하지만 내가 뭔가 세세한 이야기를 밖에서 했다면 조합원들이 편을 갈라 싸우고 그랬을 수 있다. 그런 게 싫다.”
‘반박근혜’ 말고 공통점이 없던…
-애초부터 당신과 안 맞는 조직이라는 우려의 시선도 있었다. 왜 국민티브이에 합류했나?
“김용민을 보고 간 것도, 서영석을 보고 간 것도 아니었다. 2만명 넘는 국민티브이 조합원들이 모두 ‘친노’일 거라고 보진 않았다. 그냥 대부분이 잘못된 언론 지형을 바로잡고 싶어하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게다가 나는 일단 방송쟁이니까 방송 일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특정인 몇몇에 의해 방송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영입 시도했던 쪽에서 특정인은 매우 비중이 약한 상태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 내가 지켜봐도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나를 영입했던 사람들은 중간에 다 나가고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국민티브이 내분이 커가는 데 있어 노종면이 뒤에서 후배들을 조종한다는 해석도 있었다.
“말도 안 된다. 나는 오히려 뉴스케이 후배들이 나를 불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워낙 엄하게 후배들을 대해서.”
국민티브이 문제는 좀 복잡하다. 외부에서 추정한 ‘친노파 그룹’과 ‘노종면 파’의 대립이라는 원인 분석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관계가 안 맞는 부분이 있다. 국민티브이 내분이 본격화한 것도 노 전 앵커 사퇴 다섯달 뒤 벌어진 사쪽의 ‘노조 대자보 철거 사건’이 계기였다. 정치적 대립이라기보다는 실무적인 대립에 가깝고, 신생 조직에서 민주적인 소통 구조를 마련하지 못한 채 갈등이 확산된 탓이 커 보인다.
국민티브이 출범에 관여했던 한 핵심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협동조합 언론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회사에 대해 학습이 전혀 안 되어 있는 상황에서 너무 많은 갈등이 한꺼번에 터졌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철학과 비전이 조직 안에 부재했다. ‘반박근혜’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어 보였다. 앞으로 같은 문제가 벌어진다면 그간의 과정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대안언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번 국민티브이 문제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사회 부조리를 지적하는 대중운동 조직을 살펴보면, 그 안에도 비민주적 요소들 때문에 갈등의 조짐들이 있는 경우가 있다. 그게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 건 운동의 자기모순이 드러날까봐 감추기 때문이다. 좋은 일 하는 거니까 ‘열정페이’를 감수하라는 식의 요구 등도 그런 것이다. 민주주의를 감시하고 사회를 비판하는 조직일수록 더 공개적이고 민주적으로 토론해야 한다.”
-김용민 피디는 노 전 앵커가 국민티브이로 돌아와 방송을 계속해줬으면 한다고 말하더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늘 고민은 하지만 지금은 내가 복귀할 상황이 아니다. 또 다른 갈등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배석규 전 사장 용서할 수 없어
노 전 앵커와 인터뷰를 하는 도중 노조 사무실 한편에서 누군가 기타를 튕겼다. 마치 대학교 동아리방에 놀러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노 전 앵커가 “미안해요. 인터뷰 중인데 좀 조용히 해줘요”라고 말하자 바로 조용해졌다. 노 전 앵커는 여전히 동료들 사이에서 스스럼이 없다. 동료 선후배들도 노 전 앵커에게 스스럼이 없다.
그는 평소 만나면 좀 유약한 인상을 풍긴다. 말투는 조용하고 느린 편이어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예의가 바른 편이라고 해야 할까. 사내 후배들을 제외하곤 나이 어린 이들에게 말을 놓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나이 많고 경력이 더 있다는 이유만으로 말을 놓는 게 불편하다”는 게 그의 대답이다. 어쩌면 이런 사람과 강성 노조 운동은 좀 안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이런 그가 어쩌다 노조위원장까지 하게 된 것일까?
-어렸을 때 집안 분위기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아버지는 좀 엄했다. 보수적이고 좀 다가가기 힘든 분이었다. 그에 비해 형제들은 자유로운 성격이었고 화목하게 지낸 편이었다. 아버지 안 계실 때 형제들끼리 같이 모여서 노래 부르고 놀다가 아버지 오시면 조용히 있고 그랬던 게 기억난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근근이 먹고살 만한 집에서 자랐다.”
-당신의 청년 시절은 어땠나?
“1987년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학생운동을 외면하진 않았지만 좀 비겁하게 참여한 편이었다. (한동안 눈을 천장으로 향하다가) 가투(거리투쟁) 나가던 때 심장이 벌렁거렸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거리로 나가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무섭고 잡혀갈까봐 겁났다. 그렇다고 동기들 다 참여하는데 나만 대열의 뒤로 빠지기엔 창피해서 완전히 뒤로는 못 가고 ‘뒤꽁지’쯤 서 있다가 무슨 일 벌어지면 도망가기 바쁜 학생이었다.”
-심정적인 운동권 정도로 보면 되나?
“운동권도 아니고 학생운동의 지지자 정도로 보는 게 좋겠다. 돌이켜보면 운동권이 될 뻔도 했던 것 같다. 87년에 대선이 있었잖나. 고려대 총학생회는 디제이(김대중) 비판적 지지 입장이었기에 전국에 선거참관인단을 보냈다. 나도 거기에 응했고 인천의 책임자급 선배를 따라 전단지도 돌리고 유세장도 가보고 했다. 그때는 되게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웃음)
-법학과 졸업 뒤 법조계로 안 가고 와이티엔 기자가 된 이유가?
“원래부터 법에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가 법관 하라고 권유해서 법학과에 입학한 거다. 나는 ‘딴거’ 하고 싶었는데 그 딴거의 실체가 없었다. 대안이 없었지. 서울대 안 갈 거면 아버지 말을 따르기로 약속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1993년 2월) 졸업하고 아버지께 피디가 되겠다고 말씀드리자 와이티엔 신입기자 모집 광고문을 들고 와 시험 보라고 하셨다. 난 당연히 떨어지겠거니 하고 응시했는데 그만 (94년 9월) 합격해버렸다.”
-기자가 되고 나서의 경험을 듣고 싶다.
“입사 3~4년차 기간 중에 몇몇 보람있으면서도 가슴 아픈 경험을 했다. 97년쯤이었는데 삼성생명이 개인정보 빼내 영업하던 게 발각됐다. 보도하려고 하는데 회사(와이티엔)가 ‘삼성과의 관계가 나빠져서는 안 된다’며 보도를 막으려 했다. 노조에다 ‘뒤 좀 잘 받쳐달라’고 얘기하고 잠적해버렸다. 결국 노조가 성명을 냈고 보도가 나갔다. 서울지하철 브레이크 장치에 문제가 생긴 것을 보도할 때는 ㄷ일보가 받아서 썼다. 그때는 가판 신문이 있던 시기인데 밤에 실려 있던 기사가 다음날 낮에는 사라져 있더라. 선배들이 ‘봐라. 딴 놈들은 이거 갖고 장사해먹는데 네가 고집을 부려서 우리는 장사도 못 해먹었다’고 하더라. 이 외에도 여러 사건이 있는데 그러면서 점점 부장급 선배들과 마찰이 생겼다.”
-기대했던 것과 다른 언론환경이라 실망했겠네?
“어느 정도 방송사의 내부 환경을 알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편이었다. 입사 때 ‘노조활동 할 거냐’는 질문도 받던 시기였으니까.”
-뭐라고 답했나?
“‘노조는 필요하지만 언론사에도 필요한 건지는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는 취지로 답했다. 좀 창피하지만 사실 내 소신과는 다른 답이었다. 일종의 사상검증을 당하는 자리라….(웃음) 온전히 내 소신을 말하면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어서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답을 했다.”
-정의감은 갖고 있는 편인데 그래도 뭔가 나서서 싸우는 부류까지는 아닌 성품 같다. 그런데 노조위원장까지 했네?
“2008년에 내 동기가 위원장 한 지 한달 만에 사퇴해버렸다. 대다수 노조원들이 회사에 맞서 더 싸우기를 바랐는데 타협을 해버린 거다. 더 강력하게 싸우길 바라는 쪽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내가 그때 발을 빼버리면 안 되는 처지였다. 그래서 자원해서 위원장 선거에 나갔고 당선되었다.”
-노조위원장 맡은 것 후회한 적 없나?
“단 한번도(없다).”
-그래도 결국 해고까지 당했는데. 무모한 싸움이라고 생각 안 해봤나?
“그건 우리가 무모한 싸움을 한 게 아니라 정권이 적극 개입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구본홍은 우리를 좌지우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청와대에서 경질한 거다.(2009년 8월3일 구본홍 와이티엔 사장은 사퇴를 선언한다.) 우리가 회사에서 ‘떡봉이’라고 지칭하는 그룹이 있는데 그들이 이명박 정권에 줄을 대고 반격을 한 것이다.”
-정권의 개입으로 해고됐다는 건 어떻게 확신하지?
“당사자의 증언도 이미 나온 것이라 명확하다. 2009년 내가 석방된 뒤(구속기간은 2009년 3월22일부터 4월2일까지였다) 사쪽과 긴밀하게 협의를 했었다. 해고 무효 소송을 조정을 통해 해결하기로 구두 합의했었다. 사쪽에서는 우리에게 권력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귀띔해줬다. 그런데 회사 내부에 ‘사쪽(구본홍)이 노조와 협의를 하고 있다’고 (청와대에) 정보보고 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건 구본홍 쪽 임원이 내게 한 얘기다. 그러다 얼마 있다 구본홍이 사장에서 물러나고 배석규가 사장이 되더라.(2009년 10월 취임해 2015년 3월20일 퇴임했다.) 청와대가 사장을 교체한 거지. 내가 배석규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이거다. 후배들이 파업의 상처를 겨우 수습해가려는 상황에 ‘깽판’ 놓은 것이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고 말투가 단호해지며) 회사 선배랍시고 전무로 들어와서는 겨우 한 짓이 후배들의 파업 수습 노력을 뒤엎고 사장 자리를 꿰차? 그건 언론인의 도리도 아니고 사람의 도리도 벗어났다.”
“꼭 복직해야 할까 하는 의문 들어
부당해고 증명하고픈 마음 크지만
와이티엔 구성원이 날 필요로 할까
종편 부당성 외쳤던 사람으로서
종편으로 가면 내 존재가치 잃는 것” “와이티엔과 돌발영상 지켜준다는
시민들 많았는데 돌발영상 폐지에
어떤 단체도 성명 하나 없었다
창사 20주년 기념 영상에도 빠져
내가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종편의 해악성은 여전하다” 8일 와이티엔 노조 사무실 책상에는 노동조합신문이 놓여 있었다. ‘여당 지역 정치인 홍보 도구로 전락한 YTN’이라는 제목의 머리기사가 실려 있었다. 새누리당 대구 수성갑 당협위원장 공모 심사의 공정성을 문제 삼는 보도가 정치 기사처럼 누리집에 올라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정치부 기자가 작성한 게 아니라 <와이티엔플러스>(대표 류희림)라는 자회사가 자의적으로 올린 기사였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노조는 폭로했다. 류희림 대표의 부인이 교장인 모 대안학교를 와이티엔플러스가 온라인 기사로 14차례 조명한 것에 대해서도 노조는 최근 문제제기를 했다. 지난달에는 2011년 개국한 보도채널 <연합뉴스티브이>에 시청률마저 처음으로 역전당하는 조사 결과가 나오자 사내 분위기는 더욱 뒤숭숭해졌다. 조사기관 닐슨코리아의 월별 시청률 조사에 따르면, 지난달 연합뉴스티브이의 전체 가구 시청률은 0.730%로 와이티엔의 0.708%를 상회했다. 올해 개국 20년차인 와이티엔은 여러모로 빨간불이다. 노 전 앵커는 이런 상황에 화가 나 보였다. 그는 “사장병에 걸린 사람이 결국 사장이 되었으면 와이티엔을 잘 경영했어야지”라며 거칠게 비판했다. -아직도 복직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한가? “그 질문은 참 어렵다. (한동안 침묵하다) 최근에 든 생각인데 내가 꼭 복직을 해야 할까 하는 의문도 든다. 나야 물론 복직을 하고 싶다. 와이티엔을 번듯하게 다시 세워보자는 그런 거창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나의 해고가 부당했고 그것을 위해 싸워준 사람들에게 우리가 옳았단 걸 증명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다만 그것은 와이티엔 구성원들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출발하는 건데 요즘은 나의 복직을 원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복직을 바라는 게 솔직한 것일까 그런 고민이다. 내가 복직하는 건 그냥 인간 노종면의 복직이 아니라 돌발영상을 만들었던 피디의 복귀, 뉴스창 앵커의 복귀, 와이티엔 콘텐츠 개혁을 입안했던 사람의 복직이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해직 언론인 문제를 과연 풀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가 해직 언론인 문제를 풀 의지가 있었다면 정권 초에 풀었겠지. 전두환 정권 때 해직된 언론인이 노태우 정권 초기에 다 복직한 것처럼 그렇게 풀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국민대통합위원회(한광옥 대표)는 대통령 당선 뒤인 2013년 2월 전국언론노동조합을 찾아와 해직 언론인 문제에 대해 실무 창구를 정해 논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2014년까지 물밑 논의는 진행되었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다. 강성남 당시 언론노조 위원장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한광옥 위원장이 원론적인 이야기만 계속 했다. 그것은 ‘내게 권한이 없어요’라는 말을 돌려서 표현하는 것이라 느꼈다. 이후 더 이상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통합위원회 관계자는 11일 이에 대해 “우리가 중재 노력을 기울여봤는데 방송통신위원회가 ‘해직 문제는 노사간 처리할 문제이지 정부에서 간섭할 수 없다’고 확고한 입장을 보였다. 안타깝지만 언론인 해직 문제는 사실상 우리가 더 중재할 수 없는 사안이다”라고 말했다. -솔직히 두렵지 않나. 잊힐까봐. 당신을 해직시킨 사람들은 너무나 잘 지내고 있다. 영원히 노조에서 생활비 받아서 살 수도 없는 건데. “사람들이 돌발영상을 잊어버린 건 속상하다. 와이티엔과 돌발영상 지켜준다는 시민들 많았는데 결국 돌발영상 폐지되었어도 어떤 단체도 성명 하나 없었다. 올해 와이티엔이 제작한 창사 20주년 기념 영상에 돌발영상은 빠졌더라. 내가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어떻게 아예 흔적도 없었던 것처럼 취급할 수 있는지….” -손석희 앵커처럼 종편행 제안 온 적 없나? “종편은 아닌데 어떤 채널에서 저강도로 의사 타진은 온 적 있다. 그냥 아는 선배가 밥 사주면서 ‘아무래도 같이하는 건 어렵겠지?’ 하고 묻고 내가 ‘제가 어딜 갑니까’ 그 정도 말하고 끝낸 정도다. 100억원을 갖다준다 해도 안 한다. 그건 내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손 앵커도 결국 제이티비시에서 좋은 보도 하고 있지 않나. 언론인으로서 원칙을 지키는 게 보장만 된다면 나름 의미 있는 선택 아닌가? “내가 내 입으로 종편의 부당성을 주야장천 외치며 국회에 난입하고 저항했던 사람이다. 대충 ‘종편 생기면 어때?’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으면 왜 종편에 못 가겠나. 손석희 선배는 그런 싸움을 안 했지 않나. 종편으로 옮겨간 사람들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저질러 놓은 게 있어서 그곳에서 이탈할 명분이 없다. 또 종편의 해악성은 여전하다.” 대마왕의 나라를 떠나고픈 요요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발표한 ‘2015 언론자유 보고서’에서 한국은 언론자유 지수 33점을 기록해 ‘부분적 언론자유국’으로 분류됐다. 전체 199개국 중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와 함께 공동 67위를 기록했다. 2011년 이후 5년째 언론자유국 지위를 얻지 못했다. 언론자유의 정도가 낮은 나라일수록 국민의 정치지식이 낮아진다는 미국의 연구조사(크리스토퍼 코인과 피터 리슨)도 있다. 노종면 전 앵커를 비롯한 해직 언론인의 싸움이 이들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이유다. 2012년 노 전 앵커는 와이티엔 공정방송 투쟁 일대기를 담은 책 <돌파>를 냈다. 책 서문에는 아들 해인이가 갖고 놀던 장난감 요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책에 “내 처지가 요요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표현했다. 만화영화 <이상한 나라의 폴>에선 요요를 들고 대마왕을 물리친다. 요요는 장난감이지만 이상한 나라에서는 무기다. 대마왕의 손아귀에서 니나를 구해내는 무기다. 노 전 앵커는 수년간 대마왕의 뿔을 향해 날아가는 요요로 살았지만 이제 더 이상 대마왕의 나라에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앵커이고, 기자이고, 피디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19일 오늘로써 해직 2540일째다. 이날 노 전 앵커는 조금 지쳐 보였다. 하얗게 센 머리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나이도 곧 지천명이다.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의 7년간을 해직자로 보내며 맞게 되는 나이다. 뉴스타파와 달리 국민티브이에서의 역할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현재 와이티엔 노동조합의 신문을 만드는 일이 공적인 활동의 전부다. 그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1975년 군사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다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한 기자 103명은 지금도 싸우고 있다. 노 전 앵커를 비롯한 해직 언론인들도 같은 길을 걷게 될까.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내가 꼭 와이티엔에 복귀해야 할까.” 노종면 전 와이티엔(YTN) 앵커는 해고 7년차에 접어들자 이전에 하지 않았던 고민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다고 했다. 오랜 복직 싸움에 지친 심신이 그를 조금씩 흔드는 것일까. 아니면 와이티엔이 더 이상 돌아가 일할 만한 직장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하다. 와이티엔은 노 전 앵커의 히트작 ‘돌발영상’을 끝내 폐지했다. 인터뷰는 4시간을 훌쩍 넘겨 진행됐다. 지난 8일 노종면 전 앵커가 노동조합 사무실 앞 해직일수가 적힌 게시판을 가리키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복직싸움 하며 대안방송 산파역
뉴스타파 이어 국민티브이에서
뉴스케이 진행하다 돌연 사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뉴스케이 앱 배포’ 경영진과 이견
서영석 이사장 프로진행에 문제제기
침묵하는 이사회도 견딜 수 없었다
“민주주의 감시하는 조직일수록
더 민주적이고 공개적이어야” “사표 쓰고 전화번호 바꿨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원래 살던 곳이 인천이었는데 몇달 전 경기도 양평으로 이사했다. 국민티브이 그만두고 머리도 좀 식히고 싶고 아이들을 공기 좋은 곳에서 살게 하고 싶었다. 조그맣게 텃밭 가꾸며 살고 있다. 상추, 오이, 부추, 고추, 쑥갓, 호박을 키운다. 나는 농사 방법 정도 알려주며 지시하고 애들(고등학생 딸)이 심는다.”(웃음) -국민티브이 그만두고 아무 일도 안 하는데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나? “내가 와이티엔 해직기자라서 와이티엔 노동조합에서 상당액을 보전해주고 있다.” -생활고는 피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목소리가 작아짐) 그래서 다른 부문의 해고자들 삶과는 비교할 수 없다.” -노종면을 포털에서 검색해 보면 연관 검색어로 요즘 뭐가 나오는지 아나? “뭐가 나오나?” -‘노종면 국민티브이 사퇴’, ‘노종면 사표’ 이런 것들이 와이티엔보다 먼저 나온다. 대중의 관심사라서 국민티브이 문제는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해한다.” -국민티브이 그만두고 연락은 왜 두절된 건가? “나를 지지해주는 후배들과 조합원들에게 내가 돌아올 수도 있다는 희망고문을 주는 게 싫었다. 분명하게 관두겠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싶어서 전화번호도 바꾸고 모든 접촉 창구를 막아버렸다.” 수면 아래 가라앉았던 국민티브이 내부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지난 5월부터다. 국민티브이 보도국과 제작국 일부 직원이 조직 개편과 인사 문제 등의 사안을 담은 대자보를 게시했다가 강제 철거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7월에는 프리랜서의 노동조합 참여자격 문제를 놓고 사쪽과 노조가 충돌했다. 사쪽은 7월20일 노조의 대자보 부착과 관련해 징계를 시작했고 노조는 22일부터 제작 거부에 들어가 갈등이 커져갔다. 국민티브이 정상화를 위해 공동대책위원회가 발족하는 등 여러 중재 노력 끝에 지난달 29일 국민티브이는 임시총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서영석 이사장은 사퇴하고 현상윤 전 한국방송 피디가 새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노조와 갈등을 빚던 조상운 사무국장(국민일보 해직기자)은 지난달 27일 라디오제작팀장으로 인사이동됐다가 지난 8일부터는 뉴미디어국 인터넷뉴스팀 기자로 발령받았다. 노조는 7일부터 업무에 복귀했다. 국민티브이는 18대 대선 직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만든 대안 인터넷방송사다. 지난해 4월1일 당시 2만3187명이 38억6295만원을 출자해 웹기반 티브이 방송을 시작했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국민의 성금으로 한겨레신문사가 태동했듯 국민티브이도 유사한 과정을 거쳐 출범한 것이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이 초대 이사장으로 참여했고,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의 김용민 피디와 노종면 전 와이티엔 앵커가 실무진으로 합류해 관심을 모았다. 국민티브이가 대안 언론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을지 주목받았기에 최근의 내부 갈등은 적잖은 관심을 끌어왔다. 노 전 앵커에게 인터뷰 의사를 물어본 것은 국민티브이 노사 갈등이 심화되던 올해 봄부터다. 국민티브이 노사 갈등의 한 축에 그의 사퇴가 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며 한사코 사양했다. “설사 입장을 밝히더라도 국민티브이 조합 내부에서 밝힐 것”이라며 거듭 인터뷰를 고사했다. 이달 초 그를 다시 설득했다. 그는 국민티브이 문제를 최소한의 수준에서만 언급하기로 하고 인터뷰에 응했다.
노종면 전 와이티엔(YTN) 앵커 인터뷰 모습.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해직언론인 문제를 다룬 2013년 1월5일치 <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1면에 등장했던 엠비(MB) 정부 시절에 해고된 각 언론사 기자와 피디(PD)들. 2013년 1월2일 서울 중구 태평로1가 한국언론회관 앞에 모인 모습이다. 그로부터 2년8개월이 지난 지금 노종면 전 앵커처럼 대법원에서 패소가 확정된 이도 있지만, 일부는 승소해 복직하기도 했다. 상당수는 아직도 재판 중이다. 오른쪽부터 조승호(YTN), 박성호(MBC), 조상운·황일송(국민일보), 이용마·강지웅·정영하(MBC), 우장균·노종면(YTN), 최승호·박성제(MBC), 권석재·정유신(YTN)씨.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부당해고 증명하고픈 마음 크지만
와이티엔 구성원이 날 필요로 할까
종편 부당성 외쳤던 사람으로서
종편으로 가면 내 존재가치 잃는 것” “와이티엔과 돌발영상 지켜준다는
시민들 많았는데 돌발영상 폐지에
어떤 단체도 성명 하나 없었다
창사 20주년 기념 영상에도 빠져
내가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종편의 해악성은 여전하다” 8일 와이티엔 노조 사무실 책상에는 노동조합신문이 놓여 있었다. ‘여당 지역 정치인 홍보 도구로 전락한 YTN’이라는 제목의 머리기사가 실려 있었다. 새누리당 대구 수성갑 당협위원장 공모 심사의 공정성을 문제 삼는 보도가 정치 기사처럼 누리집에 올라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정치부 기자가 작성한 게 아니라 <와이티엔플러스>(대표 류희림)라는 자회사가 자의적으로 올린 기사였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노조는 폭로했다. 류희림 대표의 부인이 교장인 모 대안학교를 와이티엔플러스가 온라인 기사로 14차례 조명한 것에 대해서도 노조는 최근 문제제기를 했다. 지난달에는 2011년 개국한 보도채널 <연합뉴스티브이>에 시청률마저 처음으로 역전당하는 조사 결과가 나오자 사내 분위기는 더욱 뒤숭숭해졌다. 조사기관 닐슨코리아의 월별 시청률 조사에 따르면, 지난달 연합뉴스티브이의 전체 가구 시청률은 0.730%로 와이티엔의 0.708%를 상회했다. 올해 개국 20년차인 와이티엔은 여러모로 빨간불이다. 노 전 앵커는 이런 상황에 화가 나 보였다. 그는 “사장병에 걸린 사람이 결국 사장이 되었으면 와이티엔을 잘 경영했어야지”라며 거칠게 비판했다. -아직도 복직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한가? “그 질문은 참 어렵다. (한동안 침묵하다) 최근에 든 생각인데 내가 꼭 복직을 해야 할까 하는 의문도 든다. 나야 물론 복직을 하고 싶다. 와이티엔을 번듯하게 다시 세워보자는 그런 거창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나의 해고가 부당했고 그것을 위해 싸워준 사람들에게 우리가 옳았단 걸 증명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다만 그것은 와이티엔 구성원들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출발하는 건데 요즘은 나의 복직을 원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복직을 바라는 게 솔직한 것일까 그런 고민이다. 내가 복직하는 건 그냥 인간 노종면의 복직이 아니라 돌발영상을 만들었던 피디의 복귀, 뉴스창 앵커의 복귀, 와이티엔 콘텐츠 개혁을 입안했던 사람의 복직이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해직 언론인 문제를 과연 풀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가 해직 언론인 문제를 풀 의지가 있었다면 정권 초에 풀었겠지. 전두환 정권 때 해직된 언론인이 노태우 정권 초기에 다 복직한 것처럼 그렇게 풀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국민대통합위원회(한광옥 대표)는 대통령 당선 뒤인 2013년 2월 전국언론노동조합을 찾아와 해직 언론인 문제에 대해 실무 창구를 정해 논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2014년까지 물밑 논의는 진행되었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다. 강성남 당시 언론노조 위원장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한광옥 위원장이 원론적인 이야기만 계속 했다. 그것은 ‘내게 권한이 없어요’라는 말을 돌려서 표현하는 것이라 느꼈다. 이후 더 이상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통합위원회 관계자는 11일 이에 대해 “우리가 중재 노력을 기울여봤는데 방송통신위원회가 ‘해직 문제는 노사간 처리할 문제이지 정부에서 간섭할 수 없다’고 확고한 입장을 보였다. 안타깝지만 언론인 해직 문제는 사실상 우리가 더 중재할 수 없는 사안이다”라고 말했다. -솔직히 두렵지 않나. 잊힐까봐. 당신을 해직시킨 사람들은 너무나 잘 지내고 있다. 영원히 노조에서 생활비 받아서 살 수도 없는 건데. “사람들이 돌발영상을 잊어버린 건 속상하다. 와이티엔과 돌발영상 지켜준다는 시민들 많았는데 결국 돌발영상 폐지되었어도 어떤 단체도 성명 하나 없었다. 올해 와이티엔이 제작한 창사 20주년 기념 영상에 돌발영상은 빠졌더라. 내가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어떻게 아예 흔적도 없었던 것처럼 취급할 수 있는지….” -손석희 앵커처럼 종편행 제안 온 적 없나? “종편은 아닌데 어떤 채널에서 저강도로 의사 타진은 온 적 있다. 그냥 아는 선배가 밥 사주면서 ‘아무래도 같이하는 건 어렵겠지?’ 하고 묻고 내가 ‘제가 어딜 갑니까’ 그 정도 말하고 끝낸 정도다. 100억원을 갖다준다 해도 안 한다. 그건 내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손 앵커도 결국 제이티비시에서 좋은 보도 하고 있지 않나. 언론인으로서 원칙을 지키는 게 보장만 된다면 나름 의미 있는 선택 아닌가? “내가 내 입으로 종편의 부당성을 주야장천 외치며 국회에 난입하고 저항했던 사람이다. 대충 ‘종편 생기면 어때?’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으면 왜 종편에 못 가겠나. 손석희 선배는 그런 싸움을 안 했지 않나. 종편으로 옮겨간 사람들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저질러 놓은 게 있어서 그곳에서 이탈할 명분이 없다. 또 종편의 해악성은 여전하다.” 대마왕의 나라를 떠나고픈 요요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발표한 ‘2015 언론자유 보고서’에서 한국은 언론자유 지수 33점을 기록해 ‘부분적 언론자유국’으로 분류됐다. 전체 199개국 중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와 함께 공동 67위를 기록했다. 2011년 이후 5년째 언론자유국 지위를 얻지 못했다. 언론자유의 정도가 낮은 나라일수록 국민의 정치지식이 낮아진다는 미국의 연구조사(크리스토퍼 코인과 피터 리슨)도 있다. 노종면 전 앵커를 비롯한 해직 언론인의 싸움이 이들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이유다. 2012년 노 전 앵커는 와이티엔 공정방송 투쟁 일대기를 담은 책 <돌파>를 냈다. 책 서문에는 아들 해인이가 갖고 놀던 장난감 요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책에 “내 처지가 요요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표현했다. 만화영화 <이상한 나라의 폴>에선 요요를 들고 대마왕을 물리친다. 요요는 장난감이지만 이상한 나라에서는 무기다. 대마왕의 손아귀에서 니나를 구해내는 무기다. 노 전 앵커는 수년간 대마왕의 뿔을 향해 날아가는 요요로 살았지만 이제 더 이상 대마왕의 나라에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앵커이고, 기자이고, 피디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19일 오늘로써 해직 2540일째다. 이날 노 전 앵커는 조금 지쳐 보였다. 하얗게 센 머리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나이도 곧 지천명이다.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의 7년간을 해직자로 보내며 맞게 되는 나이다. 뉴스타파와 달리 국민티브이에서의 역할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현재 와이티엔 노동조합의 신문을 만드는 일이 공적인 활동의 전부다. 그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1975년 군사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다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한 기자 103명은 지금도 싸우고 있다. 노 전 앵커를 비롯한 해직 언론인들도 같은 길을 걷게 될까.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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