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9월23일 서울 안국동 사무실에서 고 송건호 초대 사장(가운데)을 비롯한 창간 주역들이 ‘한겨레신문 발의자 총회’를 열고 있다. 왼쪽 둘째가 고 이병주 당시 이사이다.
동아투위 위원장·한겨레 창간…
온갖 힘든 일도 “한번 해보지 뭐”
어려움 웃음으로 넘긴 멋쟁이
온갖 힘든 일도 “한번 해보지 뭐”
어려움 웃음으로 넘긴 멋쟁이
-이병주 위원장을 떠나보내며
이병주 위원장님!
선배님과의 인연은 1974년 동아일보사 노조 결성과, 뒤이은 ‘10·24 자유언론 실천운동’ 때부터이니 어언 37년이 됩니다. 그 인연이 보통 인연입니까?
1975년 3월17일 동아일보사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 114명이 회사로부터 집단으로 쫓겨나 길거리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했을 때 우리는 함께했습니다. 선배님은 당시 동아방송 10년차 중견 피디(PD)로서 인기 프로 ‘정계야화’의 책임피디였죠.
이렇게 잘나가던 선배님께서 젊은 기자, 피디, 아나운서들이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유신독재에 맞설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부터 노조 가입, 10·24 선언 참여, 집회, 농성, 제작거부에 한결같이 함께하셨죠.
이병주 선배님!
우리는 선배님의 진짜 ‘대인’(大人) 풍모를 박정희 ‘유신 말기’에 보았습니다. 1979년 1월9일이던가요. 보도되지 않은 ‘민주민권일지’ 사건으로 동아투위원 10명이 긴급조치 9호로 구속기소되었을 때죠. 그 끝 무렵에 구속기소를 앞둔 윤활식 위원장께서 서울 중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선배님께 “다음 동아투위 위원장은 당신이 맡아야겠소”라고 하셨을 때, 군말 없이 수락하셨죠. 당시 동아투위 위원장을 맡는다는 것은 감옥행을 예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결국 선배님께서는 81년 5·17 군사쿠데타 직후 1년 가까이 수배생활을 하셨죠. 그때부터 동아투위 후배들은 어떤 일을 하느냐 마느냐 고민할 때 항상 선배님과 상의하였죠. 선배님께서는 그 일이 시대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면 어떤 어려움이 예상되더라도 “한번 해보지 뭐!”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87년 6월항쟁 직후 한겨레신문 창간 제의를 접했을 때도 “한번 해보지 뭐!”라고 하시며 앞장서셨죠. 또 선배님께서는 한겨레신문은 국민주 신문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죠. 돌이켜보면 동아투위가 가장 어려웠을 때 위원장으로서 온갖 고난을 온몸으로 겪었고, 한겨레신문이 가장 힘들었던 초창기에도 총괄상무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셨죠.
선배님!
후리후리한 키에 멋진 바바리코트를 휘날리며 온갖 어려움을 웃음으로 넘기셨던 우리 시대의 진정한 멋쟁이, 진정한 사나이가 사라져가는 이 허허로움을 어찌할까요.
선배님,
대인이신 당신도 늘 한가지를 안타까워하셨죠. 음악가를 꿈꾸던 외동딸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 것 하나만은! 그러나 그 따님은 미국 샘휴스턴주립대학 음대 교수로서 세계적 음악가로 성장하고 있고, 사모님께서도 늘 강건하시니, 이제는 우리의 이 아픔과 슬픔도 모두 잊으시고 영면하시옵소서!
2011년 5월4일
성유보 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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