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과 필자 이종옥씨는 1970년대 초 반유신 민주화 운동을 하다 구속된 남편 안병무 박사, 이해동 목사의 부인으로 인연을 맺어 평생토록 친구이자 동지로 교유했다. 사진은 76년 ‘3·1 명동성당 사건’ 구속자 가족들의 석방 촉구 거리시위 때로, 왼쪽부터 박순리(서남동 교수 부인)·이종옥·박영숙·공덕귀(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이희호(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씨.
가신이의 발자취
여성운동가 박영숙 언니를 보내며
여성운동가 박영숙 언니를 보내며
어제 대지의 품에 박영숙 언니를 안장하고 돌아왔다. 벌써 그 이름만 떠올려도 다시금 보고 싶어지고 그리워지는데 이 허전함을 어떻게 달랠까 걱정스럽다.
지난 일년 남짓 암과 싸우는 그의 곁에서 몹시 아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내가 그 진한 아픔을 나누어 질 수 있어서, 조금이라도 그 통증을 덜어드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우린 참 많은 추억거리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언니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70년대 초부터 40여년 동안 늘 가까이에서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며, 같이 울고 웃으며, 정을 나누며 살아왔다. 80년대 초 우리 식구들을 독일로 보내놓고는 친정엄마처럼 고춧가루를 비롯하여 각종 마른반찬을 꾸려서 보내주던 자상한 언니, 수시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그리워하며 지냈다.
박영숙은 겉으로는 대범하나 속은 매우 따뜻했다. 70년대 부군인 안병무 박사와 함께 오손도손 살던 수유리 자택은 민주화운동 동지들의 거점이었고 잔치마당이었다. 해마다 4·19혁명 기념일이면 함석헌·김대중·문익환·서남동·문동환·이문영·한승헌·예춘호·유인호·고은 선생, 그리고 내 남편 이해동 등 민주 동지들이 아침 일찍 4·19묘지를 참배하고 안 박사 댁으로 내려와 아침식사를 하며 결속을 다졌다. 시도 때도 없이 모임도 잦았고 그럴 때마다 잔치를 벌였다. 쉰살에 늦장가를 간 고은 시인의 결혼잔치도 함석헌 선생을 주례로 그 댁 잔디밭에서 올렸다. 언니는 늘 손수 푸짐한 음식을 장만했고, 나는 그저 언니의 조수 노릇을 했다.
박영숙은 참 억척스런 사람이었다. 그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뜻이 있는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하는 여장부였다. 70년대 내내 유신체제에 항거하다 구속된 수많은 재소자들을 위해 바자회를 열고, 그 수익금으로 학생들 영치금과 무의탁 재소자들에게 내복을 차입해주는 일을 지치지도 않고 앞장서 해냈다. 2010년 사랑의친구들에서 나와 함께 제안한 ‘북한 어린이 결핵환자를 위한 사랑의 목도리 뜨기 운동’을 할 때도 며칠 밤을 새워가며 600개나 짜낸 그였다.
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남편들이 구속되고 가족들은 밖에서 투쟁할 때 이희호 선생의 생일을 맞았다. 가족들은 저마다 담당형사를 따돌리고 북한산 밑(진관외동)에 있는 예춘호 선생의 농장에 모여 잔치를 열었다. 그때도 음식은 언니와 내가 장만했는데, 그해 9월이 유난히 더워서 녹아내린 케이크를 차려놓고, 돗자리도 없어서 신문지를 깔아놓고 축하의 절을 올려야 했지만 감동은 더 컸다.
박영숙은 여성 후배들도 헌신적으로 챙기고 격려했다. 새해맞이며 생일이며 이런저런 계기 때마다 여성 동지들을 초청해 우의와 결속을 다지도록 잔치를 베풀었다. 지난해 4월 총선 직후 밤을 새우며 음식을 장만하고 여성 당선자 80명을 초대한 자리가 마지막 잔치일 줄이야. 이제 누가 그를 대신할 수 있을까!
장례식 전날, 연세대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시민단체들이 마련한 추모 모임에서 ‘박영숙이 주는 선물’이라며 나눠준 난 화분을 들고 택시를 탔다. 운전기사가 박영숙 선생 상가에서 오느냐고 물으며 아까운 분이 돌아가셨다고 인사를 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조화는 왔느냐’고 물어 오지 않았다고 답했더니, 나라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한 훌륭한 분을 국립묘지에는 못 모시더라도 조화는 보내야 되는 것 아니냐고, 그러면서 어떻게 국민통합을 말할 수 있느냐고 흥분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아, 이렇게 바른 생각을 가진 국민들이 곳곳에 있구나 싶어서 흐뭇했다.
박영숙, 그 진한 아픔 끝났으니 이제 그리워했던 안 박사와 함께 주님 안에서 편히 쉬기를 바랄게요. 나도 이제 그만 울고 당신과 함께 즐거웠던 일만 회상하며 열심히 살다 갈게요.
이종옥/사랑의친구들 이사
<한겨레 인기기사>
■ “죽인다”는 남편과 ‘협의’하라니…아내는 이혼소송중 살해됐다
■ ‘일베’ 중독된 회원 만나보니…“‘김치X’라고 쓰면 기분이 풀린다”
■ 일본 기자들이 본 이대호는…승부사, 센스맨, 매너남
■ 삼성-팬택 ‘적과의 동침’…‘스마트폰 삼국지’ 윈윈할까
■ [화보] 한국형 기동헬기 수리온의 힘찬 비상
■ “죽인다”는 남편과 ‘협의’하라니…아내는 이혼소송중 살해됐다
■ ‘일베’ 중독된 회원 만나보니…“‘김치X’라고 쓰면 기분이 풀린다”
■ 일본 기자들이 본 이대호는…승부사, 센스맨, 매너남
■ 삼성-팬택 ‘적과의 동침’…‘스마트폰 삼국지’ 윈윈할까
■ [화보] 한국형 기동헬기 수리온의 힘찬 비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