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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이웃 전태일 열사와 함께 ‘핍박받는 노동현실’ 아파하겠지요”

등록 2020-12-10 20:36수정 2022-03-17 12:07

[가신이의 발자취] ‘조영래 변호사’ 30주기를 기리며
최고 학벌·사시 합격·보장된 출세
스스로 버리고 낮은 곳 ‘무소유의 삶’

‘민청학련’ 수배 6년간 청계천 샅샅이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집필
‘가장 아름답고 격조있는 영혼의 만남’
고 조영래 변호사는 1990년 12월 폐암으로 마흔 세살 이른 나이에 별세했다. 오는 12일 30주기를 맞는다. <한겨레> 자료사진
고 조영래 변호사는 1990년 12월 폐암으로 마흔 세살 이른 나이에 별세했다. 오는 12일 30주기를 맞는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식을 무소유한 조영래! 진정한 무소유의 참뜻은 소유할 능력이 충분한데도 소유를 거부하는 것이다.

조영래는 지식을 습득하고 소유하는 데 탁월했다. 우리나라 수재들이 모인 경기고 시절 공부보다는 동아리 활동에 열심이었고, 고3 때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하다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럼에도 수석 졸업을 했고,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법대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도 한일회담 반대, 6·7선거 부정 규탄, 3선 개헌 반대 등으로 근신처분을 받으면서 항상 박정희 독재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1970년 11월 사법시험 준비 중 전태일 분신 소식을 듣자 곧바로 장례식장에 달려갔다. 서울법대 학생장을 주선하고 시국선언문을 초안했다. 1971년 10월 사법연수원 재학 중에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6개월 옥살이를 했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어 6년 가까이 도피 생활을 했다.

위인은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다고 한다. 조영래는 도피 중에도 청계천 일대에서 전태일의 영혼을 찾아다녔다.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고, 전태일과 함께했던 청계천 노동자들의 현실을 살폈다. 조영래가 본 것은 인간 이하 대우를 받는 가난한 노동자 삶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서 삶이 귀중하다는 것을 배웠다.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은 비록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했지만 법대 교재인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구해 읽느나 씨름했다. 그때 답답함 때문에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비록 전태일은 죽고 난 뒤였지만, 그가 그토록 원했던 대학생 친구인 아름답고 위대한 청년 조영래가 찾아온 것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라는 청계천 밑바닥 노동자의 유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을 깨우치게 한 사자후였다. 그 어떤 지성인(이른바 먹물)들도 감히 외치지 못한 근원적인 ‘자각’이었다. 조영래의 진정한 위대함은 이 노동자의 외침이 우리 남한 자본주의 사회 모순에 던진 핵심적 사자후란 걸 이해하고 받아들인 점이다.

조영래는 도피기간 동안 전태일의 삶을 완벽하게 복원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이름으로 써냈다. 이 책은 1983년 전두환 정권의 모진 탄압에도 출간되어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 가장 큰 울림을 남겼다. 그의 사후 <전태일 평전>으로 재출간했을 때 비로소 ‘저자 조영래’로 밝혀졌다.

전태일은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노동자 고통의 본질을 알아냈다. 조영래는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 내려와 노동자의 고통을 듣고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혼과 혼으로 이어진 두 사람 인연을 나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격조 있는 만남’이라 부른다. 근대사에서 동학 두 주역인 최제우와 전봉준 만남처럼 말이다.

조영래는 사법연수원 시절 이렇게 다짐했기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지식을 소유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우여곡절 끝에 1983년 변호사 개업을 한 그는 물난리로 집 잃은 수재민, 연탄공장 옆에 살다 진폐증이 걸린 시민, 교통사고로 직장을 잃게 된 전화 교환원 같은 돈 없고, 힘없는 서민으로 사회에서 관심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1986년 위장 취업한 한 여성이 부천 경찰서에 끌려가 성고문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그 연약한 여성의 참담한 호소를 공권력은 왜곡해서 무시했고, 누구도 ‘5공’의 공권력에 대항해야만 하는 그 사건을 변론하지 않으려 했다. 조영래는 이 ‘부천성고문 사건’을 스스로 맡아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부도덕성을 드러내어, 1987년 민주화대투쟁의 기폭제를 마련했다. 더불어 노동, 빈민, 공해, 학생 관련 사건의 인권 변호에도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87년말 치른 대선에서 김영삼·김대중 양김의 분열로 5공 청산이 물 건너가자, 조영래는 어리석은 시대의 아픔을 줄담배로 달랬다. 1990년 9월 폐암 진단을 받고 그해 12월 세상을 떴다. 그의 병명을 누군가는 ‘시대암’(時代癌)으로 진단했다.

조영래가 소유한 것은 오직 ‘진실’뿐이었다. 그는 최고 학부의 지식을 ‘진실’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만 사용했다. 43년의 길지 않은 삶에서 자신이 쌓은 지식으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소유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아들에게 쓴 펀지 일부분이다. “아빠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단다.”

조영래 변호사(오른쪽)와 전태일 열사(왼쪽)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의 민주열사 묘역에 이웃처럼 가까이 잠들어 있다. ‘전태일 동지 추모비’의 비문은 조 변호사가 썼다. 사진 송필경 이사 제공
조영래 변호사(오른쪽)와 전태일 열사(왼쪽)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의 민주열사 묘역에 이웃처럼 가까이 잠들어 있다. ‘전태일 동지 추모비’의 비문은 조 변호사가 썼다. 사진 송필경 이사 제공

1970년 이후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비롯한 모든 민주화운동은 전태일과 조영래 이들 두 분에게 가장 많은 빚을 안고 있다 해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 분은 자신의 가장 귀중한 생명을 무소유 했고, 한 분은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지식을 무소유 했다.

올해는 전태일 서거 50년, 조영래 서거 30년이다. 12월 12일은 조영래 변호사 서거 30주기인 날이다. 조영래 변호사 묘는 모란공원에 있는 전태일 열사의 묘와 서로 영혼으로 대화하기 쉽게 이웃에 자리하고 있다. 아마 아직도 핍박 받는 노동계 현실을 보시고 있다면 무척 가슴 아파하시리라.

지금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진보는 전태일과 조영래가 보여준 무소유의 의미를 복원해야 한다. 이분들은 꺼지지 않는 횃불이요, 시대정신이 솟아나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우리는 영원히 활활 타오르는 이 횃불로 암흑을 밝히고, 끊임없이 솟는 이 샘에서 자유와 평등과 사랑의 목마름을 해소해야 한다.

송필경/전태일의 친구들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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