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9월 도쿄에서 열린 고 정경모 선생의 회고록 일어판 <시대의 불침번> 출간 기념회 때 한국 축하객들과 함께한 기념사진. 정경모(앞줄 맨 가운데) 선생 바로 뒷쪽이 필자 조성우 위원장이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 조군 , 내 창끝이 무거우니 , 자네가 좀 거드소 .” 1984 년 가을이었다 . 이른바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 으로 징역살이를 잠시 한 뒤 일본으로 추방당해 도쿄대 대학원 국제관계론연구과에 입학하던 무렵이었다 . 좀처럼 폭음은 안 하시지만 평소 술을 즐겨 드시던 정경모 선생님과 도쿄 시부야에 있는 ‘ 씨알의 힘 ’ 사무실 근처에서 한잔 할 때 불쑥 내게 내던진 말씀이었다 .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정 선생님 삶의 궤적을 조금은 알고 있던 터여서 더욱 그랬다 . 결국 학위를 포기하고 ‘ 우리문화연구소 ’ 를 세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문화패 ‘ 한우리 ’ 를 조직하고 , 일제부터 5·18 광주민중항쟁까지를 주제로 한 마당극 <통일굿>의 일본 전역 순회공연에 나섰다. 그 과정 내내 정 선생님은 직 · 간접의 지도와 성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
정 선생님은 일본 게이오대학 의대 예과를 마치고 서울 의대를 다니다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한 자연과학도 였지만 , 문학과 예술에 대한 넓고 깊은 관심은 물론 소양도 뛰어난 분이었다 . 어릴 적 성가대 활동 때부터 ‘미성의 테너’로 두드러졌던 노래 솜씨는 연세가 들어서도 일본 , 한국 , 독일 등의 가곡을 원어로 멋지게 소화해내셨다 . 개인 독주회도 몇차례 열만큼 인기도 끌었다.
<아사히신문>에 기고했던 ‘ 어느 한국인의 감회 ’ 는 아사히출판사에서 책으로 출판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고 , 브루스 커밍스의 명저 <한국전쟁의 기원> 을 일어로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 필생의 과제로 번역해놓은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은 머지많아 출판을 앞두고 있다 .
무엇보다도 1973년 ‘ 김대중 납치사건 ’ 전후로 한국민주회복민족통일협의회 ( 한민통 )의 기관지인 <민족시보> 주필로서 보여주었던 정 선생님의 유려하면서도 날카로운 필력은 당대를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
정 선생님은 스스로를 일본말로 ‘ 잇 삐끼 오오가미’ ( 一匹狼 ) 로 표현했다 . 늑대는 무리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는데 , 무리를 떠나 홀로 사는 늑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 말그대로, 선생님은 세상과 한치도 타협하지 않았다 . 연합 군 통역관으로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의 긴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국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고 , 그래서 진보적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 결국 사상이 불온하다하여 미군에서도 쫒겨났고 에모리대학에도 복학하지 못했다 .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시절 울산에 석유화학단지 건설이 시작될 무렵 상공부 기술고문으로 일하다가 군사독재에 반발하여 일본으로 떠나버린다 . 망명해서도 일본은 물론 , 남 · 북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삶이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일이기도 했다 . 그러나 선생님은 거침없이 그 길을 택했다 .
불같은 성격이면서도 참으로 따뜻한 분이였다 . 게이오대학 시절 하숙집의 동갑내기 딸 ‘ 나카무라 치요코 ‘와 결혼한 순애보의 주인공이자, 지금껏 70 년 가까운 세월을 해로하셨다 .
끝내 유골이 되어 귀국하셨지만, 정 선생님은 결코 ‘ 외로운 늑대 ’ 는 아니었다 . 일본인과 재일동포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선생님을 따랐고 그 의로운 삶은 후학들에게 길이 길이 기억되어 삶 속에서 고스란히 , 아니 더욱 커져서 되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
오늘 31일부터 새달 1일까지 뒤늦게나마 서울 하늘 아래 빈소(한겨레두레상조 공간 채비)를 차리고, 문익환·유원호 ‘방북 동지’들이 잠든 고국땅 모란공원에 모셔 마지막 인사를 올릴 수 있으니 새삼 감회에 젖는다. 부디 평안하소서.
조성우/고 정경모 선생 유해봉안위원회 공동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