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4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관련해 수배된 김현장·문부식·김은숙 등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사진)를 구속시킨 전두환 정권은 천주교를 비롯한 종교계의 거센 반발에 밀려 이듬해 광복절 특사로 풀어줬다. 필자는 87년 원주교구를 찾아가 최 신부 쪽에 후원금을 전하기도 했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45
박정희의 비극적인 말로에도 불구하고 군부독재의 망령은 참으로 질겼다.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가 탄생한 1987년은 그 망령과 마지막 사투를 벌이던 처절한 고통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해 1월14일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폭로됐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니, 참으로 분개스러웠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군부독재의 패악이 우리 시민들을, 그것도 우리 사회의 미래를 짊어진 젊은이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박종철은 당시 서울대 3학년이었다.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수사의 참고인이라는 이유로 강제연행된 그는 선배의 소재를 캐묻는 경찰의 심문에 끝내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가혹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던 중 조사실에서 숨졌다. ‘충격사’로 은폐·조작하려던 경찰의 의도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와 검찰 수사 끝에 물고문에 의한 사망으로 밝혀졌다. 고 김승훈 신부가 명동성당의 5·18 7주기 추도미사에서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박종철 열사 사건’은 6월항쟁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고, 전두환과 노태우 군사정권은 ‘6·29 선언’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9월 전교협 결성을 앞두고 한창 분주하던 중에, 나는 혼자서 천주교 원주교구를 찾아갔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던 지학순 주교님(93년 작고)이 교구장으로 계실 때였다. 지 주교의 투옥 사건은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의 계기가 됐고, 지 주교님과 원주교구는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안식처였다.
어느 일요일 이른 아침 길을 나서 원주로 간 나는 ‘82년 광주항쟁 관련 수배중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배후조종 혐의로 수배된 김현장과 방화사건을 주도한 문부식과 김은식 등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은 최기식 신부님을 찾았다. 마침 최 신부님이 외출중이어서 다른 신부님에게 준비해 간 후원금 봉투만 전하고 돌아왔다. “저는 광주에서 온 교사입니다. 최 신부님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수배된 학생들을 도와주시며 큰 힘이 되어주셨다기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 뒤로도 한번 신부님들과 천주교 원주교구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 혼자서 원주교구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80년 5·18 이후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비롯해 반미시위가 빈번히 일어났다. ‘우리나라가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젊은이들의 인식이 처음 표출된 사건이었다. 대한민국의 군통수권을 한국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이 가지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었다. 군부독재정권의 오랜 언론통제로 인해 ‘대한민국과 미국은 혈맹이자 우방국가로서 평등한 관계’로 믿고 있던 국민들의 착각을 단번에 깨뜨린 충격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반미시위는 대한민국의 아들딸로서 혈기왕성한 미래의 주인공들이 미국을 향해 ‘5월 광주’의 첫 발포명령자가 누구인지 밝힐 것을 요구한 몸부림이었다. 미국은 진실을 알고 있을 테지만, 지금까지도 발포명령자를 밝히지 않고 있다.
88년 7월 나는 문교부가 추진한 ‘미국·캐나다 교육계 시찰단’으로 전국 초·중·고 교사 24명에 포함돼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게 됐다. 혼자만 드문 기회를 얻은 것 같아 동료 선생님들에게 뭔가 선물을 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선물을 사오기보다 출발 전에 사놓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서점을 갔다. <우리는 결코 둘일 수 없다>(도서출판 남풍)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펼쳐보니 통일에 대한 책이었다. ‘남북이 결코 둘이 아니다’라는 내용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산하 ‘평화적 조국통일 촉진 학생추진위원회’에서 펴낸 책이었다. 곧바로 60권을 주문해놓고 출장을 다녀온 뒤 우리 학교 전체 교직원들에게 돌렸다. 87년 8월 출범한 전대협은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선도했다.
우리 사회 민주화의 최대 분수령이었던 87·88년 무렵을 되짚어보며, 20년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군부독재 마약’의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새삼 실감한다. 한편에서는 오히려 박정희 향수를 타고 독재자의 자손들이 역사 앞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라 안팎으로 활개를 치고 다니는 부끄러운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우리 국민이 박정희 신드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이 나라는 구제할 길이 없다”고 경고했던 리영희 선생님의 부재가 새삼 안타깝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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