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의 삶에도 ‘첫사랑’이라 이름 지을 수 있는 사목의 순간이 있다. 꽃 같은 수녀 2년째에 마산교구 교육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교육국장 신은근 신부님은 경상도 분 같지 않게, 매사에 부드럽고 남에 대한 배려가 깊었다. 그런데 박식하고 말 잘하고 글까지 잘 쓰는 그분에겐 강의와 청탁이 쇄도했다. 그래서 본업인 교육국 일보다 밖의 일로 늘 분주했다. 어느 때는 겹치기 강의요청을 수락해놓고선 쩔쩔맸다.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수녀는 교육국 일로 눈코 뜰 새가 없는데…. 도대체 이게 뭐야?’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하고 결전을 준비했다. 어느 날 신부님이 아침 일찍 나갔다가 해 질 녘에야 돌아오자마자 따다따다 쏘아붙였다. 당황한 신부님은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다음날 오후였다. 신부님이 찾는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말뿐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지 않아 벌떡 먼저 일어나 돌아서는데 신부님이 불러세웠다.
“수녀님! 잠깐만요. 이렇게 끝내면 안 되죠…. 우리 기도하고 마칩시다.”
‘아니, 지금 이 판국에 기도를 하자고요? 말도 안 돼…’라는 말이 나오려는 걸 억누르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신부님은 ‘주님의 기도’를 선창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그 구절을 되뇌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후에도 신부님은 여전히 다사다망했다. 그러나 서로의 한계를 좀더 인정해주고 존중해주게 됐다.
그로부터 벌써 22년이 흘렀다. 신부님은 지금은 미국 교포 사목을 하고 계신다. 흔히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에게 사목의 첫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년에 한두 번 연락을 드려도 변함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녀님, 지는 사람이 이기는 법입니다.”
김인숙 수녀
clara2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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