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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기억의 몰수

등록 2015-02-03 19:52수정 2015-02-03 20:38

쉼과 깸
꼭 2년 만에 찾은 두물머리다. 2012년 여름, 4대강 사업에 맞서 유기농지 보전을 위해 싸우던 농민들과 행정대집행을 앞둔 새벽 어스름 풀밭 사이에서 ‘최후의 미사’를 드리곤 아마 처음일 게다. 빼곡한 비닐하우스와 털털거리던 농로는 사라지고 반듯한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가 들어섰다. 고즈넉하다. 더 깊숙이 들어갔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꼭짓점, 3년 반 동안 하루도 쉼 없이 기도가 이어졌던 미사 터에는 새로 조성된 공원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솟아 있다. 막 잘려나간 나무토막을 주워다 철사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십자가가 신통하게 계절 따라 새순을 품고 낙엽을 떨구던 바로 그 자리에 말이다. 간절한 기억을 머금은 땅 위에 점령자들이 남긴 표지치곤 낯설게 평화롭다. 짐짓 경건하기까지 하다.

‘담나시오 메모리에’(damnatio memoriae), 기억의 몰수다. 개인 또는 특정의 기억을 역사에서 지우려는 권력자들의 유구한 습성이다. 시가 사라진 시대, 어쩌면 상징과 은유의 힘을 이해하는 이는 정작 점령자들뿐인지도 모른다. 기억을 씻으려는 몰수의 상징이 어디 두물머리뿐일까. 대한문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 위에 아무렇게나 부어진 흙더미나, 얼마 전 6주기를 맞이한 용산참사 희생자들이 망연자실 바라봐야 했던 황망한 빈터 역시 마찬가지다. 동료의 넋을 기리며 피워 올리던 눈물을 묻어버린 무덤 같은 화단도, 억척스레 벌어 애틋하게 살고 싶던 무수한 아우성을 밀어내고 웅웅거리는 무위의 소리로 가득 메운 용산의 공터도 기억의 몰수다. 상징의 힘을 간파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빈터처럼 공허하고, 그들의 시는 참혹한 은유다.

‘담나시오 메모리에’, 점령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상징 속에서 저 옛날 카르타고의 저항을 모퉁잇돌 하나 남김없이 지우려던 로마제국의 환영을 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상징보다 더 질기고 견고한 것이 사람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상징이다. 대조(對照) 상징, 바로 쉼 없이 이어지는 삶들이 풀어내는 애환이다. 강변의 미사 터, 용산의 망루, 대한문 앞 분향소. 지금껏 나를 놓아주지 않는 상징들처럼 말이다. 절규와 눈물이 마르지 않던 자리지만 무쇠솥을 걸어 늘 넉넉히 밥을 지어 나눠 먹었고 전쟁 같은 날들 속에 사람들은 사랑을 했다.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때문에 내가 품은 상징은 늘 애틋하고 끈적거리며 끈덕지다. 질긴 생명들이 뿜어내는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짙어질 뿐이다. 점령자들이 영원히 점령자일 수 없는 이유다.

장동훈(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장동훈(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점령자들은 오늘도 육중한 돌과 결코 아름답지 못한 꽃 무덤 사이에서 카르타고의 환영을 보는지 모른다. 하지만 환영은 환영이다. 숱한 권력의 상징들이 스러지고 사라져갔다. 하지만 삶이 품은 기억들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글을 쓰는 이 시간, 해군기지 건설에 저항하던 제주 강정에서는 행정대집행에 맞선 못난이들의 안간힘이 온종일 이어지고 있다. 결국 깨지고 밀려날 테지만 그들이 나눈 기억은 계속될 테고 꿈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저 남녘 어딘가에서 총총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노란 기억들의 행렬처럼, 70미터 고공 위 줄에 묶여 대롱대롱 올라오는 도시락을 받아든 노동자들의 시간처럼 말이다.

장동훈(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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