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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억대 연봉 버리고 산에 오른 후배는…

등록 2015-04-14 20:11수정 2015-04-14 20:48

필자 이권우씨가 ‘조건 좋은’ 회사를 때려치운 후배 도형석씨와 함께 나선 전북 무주 덕유산 눈밭 산행길.
필자 이권우씨가 ‘조건 좋은’ 회사를 때려치운 후배 도형석씨와 함께 나선 전북 무주 덕유산 눈밭 산행길.
이권우의 ‘산에서 만난 사람’
도형석은 대학 교지편집부 8년 후배다. 졸업하고도 후배들이랑 어울려 술 마시던 시절이 있던지라 얼굴은 익었다. 하지만 무얼 하고 살았는지는 몰랐다. 후배들 중엔 학생 시절의 진보적 가치를 사회에 나가서도 놓치지 않고 살려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의외로 사회생활을 잘했다. 나는 늘 사회와 불화하며 사는데, 후배들은 제 갈 길을 잘 찾아갔다. 형석이도 그러려니 했다. 무얼 하고 살았든지 잘 살았겠거니 했다. 산을 타고 싶어 한다길래 같이 올랐다. 산행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틈틈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다는 점이다. 뒤풀이하면서는 더 깊고 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내가 혼자만 산에 가지 않는 이유다.

학생시절 진보운동권 후배
사회변혁 위해 뜨거운 열정의 삶
어느덧 방향성 사라지고 성공만 남아
피로사회적 삶을 산 결과는 번아웃
산에 자주 오르다 보면
어느 봉우리에 오르는 것보다
긴 능선을 타는 게 더 좋고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걸 알게 될 것

내가 다닌 학교는 서울과 수원에 캠퍼스가 있다. 당시에는 중복 학과가 여럿 있어 분교 취급을 받았는데, 지금은 잘 정리되어 또 하나의 캠퍼스 기능을 하고 있다. 형석이는 수원캠퍼스 90학번이다. 학생운동 퇴조기에 대학을 다녔고, 그것도 평등파적 관점을 강하게 드러낸 교지편집부에서 활동했다. 수원캠퍼스는 자주파가 득세한지라 교지 후배들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예산 삭감 위협을 받거나, 총학생회에 합치려는 움직임이 자주 있었다. 술자리에서 형석이는 총학생회 쪽에 불려가 20 대 1로 맞짱 떴던 무용담을 말했다. 주먹다짐을 했다는 뜻은 아니고, 이론 투쟁을 했다는 말인데, 나는 그냥 한 귀로 흘려들었다. 추억은 늘 과장의 외피를 입고 나타나는 법이니까 말이다.

문제는 소련 몰락 이후 겪은 대혼란이다. 명망 있는 운동가들도 궤도 수정을 하는 마당이니 학생운동권이 받은 타격은 컸다. 운동하다 도망가거나 군대 가거나 휴학하곤 했다. 형석이가 겪은 고통도 비슷했다. 혁명의 불쏘시개가 되겠노라 설레발쳤던 선배들이 사라지니 공황상태에 몰릴 도리밖에 없었다. 실망과 좌절이 겹쳤을 테다. 그도 군대에 갔고, 제대한 다음에는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갔더랬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밑밥을 충실히 준비한 셈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이권우 도서평론가.
대학을 졸업한 다음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했더라면 형석이의 삶도 많이 달라졌을 테다. 그런데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선배들과 사업한답시고 어울리다 마음도 상하고 돈도 버리는 일을 겪었다. 한번은 엘피지(LPG)개조 사업을 했다. 처음엔 잘나갔는데, 정비공장에 불이 나 망했다. 이어 손댄 것은 아이티(IT) 쪽이었다. 일은 많았는데 수금이 되질 않았다. 이러고저러고 버티다 결국엔 파산하고 말았다. 이때 진 빚을 갚느라 고생이 많았다. 영어도 되고, 전공인 산업공학 살려 번듯한 회사에 들어가도 될 텐데 왜 굳이 선배들이랑 사업하느라 고생만 했을까? 이때까지만 해도 운동논리가 더 강했던 모양이다. 잘되는 사업체를 성장시켜 운동했던 후배들을 받아들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때는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후배 챙기겠다고 설레발치는 일은 흔했다.

아이티 일 하면서 빚을 많이 졌지만, 그 덕에 예상하지 못한 분야에서 일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학원 쪽 작업을 했는데,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쪽에서 발탁했다. 성과에 대한 대가를 약속받았다. 그도 기왕 하는 일이라면 정열적으로 하고 싶었다. 영어 잘하고, 아이티 분야에 경험까지 있어 그야말로 적임자였다. 학원에서 원하는 바를 가장 정확히 알고 효율적으로 해내니, 사업마다 대박을 터뜨렸다. 학원의 성장세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도 이사로 승진했다. 그는 더 신이 나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출근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살았다. 세속의 잣대로 보면 전성기를 맞이했다. 돈과 직위가 주는 힘에 매료당했다. 정말, 집에는 옷이나 갈아입으려 들렀다. 그런데 발목을 잡는 데가 있었다. 바로 가족이었다. 아내와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졌다. 대학 때부터 사귀어온 사이인지라 서로를 잘 알고 있다 여겼는데, 아내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말과 행동을 자주 했다. 그러다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일요일에 출근하러 나가는데 “우리 집에 또 놀러 와요”라고 아이가 인사했다. 하도 아버지를 제대로 못 보니 한 말이었다. 순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었다. 마음의 중압감을 몸이 눈치챈 모양이다. 새벽에 검도 하며 몸을 관리해왔지만, 여기저기 고장나기 시작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형석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두 개의 열쇳말을 떠올렸다. 영구기관과 번아웃. 바깥에서 에너지 공급을 받지 않고도 영구히 작동하는 동력기관을 영구기관이라 한다. 학생운동 시절, 사회변혁을 위해 온몸을 바치겠다는 열정에 휩싸였던 이들의 장점은, 그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그 열정이 자신의 삶이라는 동력기관의 에너지가 되었다. 문제는 방향성이다. 사회변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성공적 삶이라는 열망이 들어왔다. 우리 사회가 의외로 운동권 출신을 수용한 데에는 이 열정에 대한 착취가 있었다고 본다. 열과 성을 다해 주어진 과제를 해결해야만 비로소 존재를 긍정하는 속성을 이용했다. 영구기관의 악령에 사로잡혀 피로사회적 삶을 산 결과는 번아웃일 수밖에 없다. 몸과 가정이 병들고 말았다. 형석이는 바로 이 늪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바람직한 삶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이 성찰의 힘이 그를 피로사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했다. 몸과 가정을 되살리기로 했다. 억대 연봉과 무제한 사용 가능한 법인카드를 포기했다.

형석이가 잘못 살았다고 지탄할 수는 없다. 누가, 누구에게 잘 살았니 못 살았니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내남없이 청년 시절에 품었던 진보성이 희석된 지 오래다. 겨 묻었거나 똥 묻었거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형석이는 쉽게 사로잡힐 수 있는 악령에서 스스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꾼다. 과거의 삶이 아니라 지금의 삶에 초점을 맞춰 상찬할 일이다. 내가 형석이에게 배워야 할 삶의 자세라는 말이다. 형석이는 이제 함께할 대안의 삶을 깊이 고민하고 있다.

얼마 전 형석이가 페이스북에 비 오는 날 북한산 타고 힘들었다는 내용의 글과 사진을 올렸다. 또 열심이군, 하는 생각이 났다. 그래도 산에 열심인 것은 괜찮다. 걷다 보면 성찰하고, 더 걷다 보면 모든 근심을 잊게 되니까. 자주 산행을 하다 보면 어느 봉에 오르는 것보다 긴 능선을 타는 게 더 좋다는 걸 알 테니까. 그게 목표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잠언을 뜻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겠지. 잠시 바짝 용을 써 오르는 것보다 속도 조절하고 몸 상태에 맞게 걷는 게 등산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그게 급진보다 중용이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거라는 오래된 지혜를 뜻한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회 닿는 대로 형석이와 산에 가는 일뿐이다. 잘 사는 법은 산이 말해줄 터이니 말이다.

글·사진 이권우(도서평론가)

이권우씨는 인터넷 휴심정(well.hani.co.kr)에 산행을 함께 하며 듣는 인생담 ‘길과 얻음’을 연재 중이다. 도형석씨도 그가 전국의 여러 산에 오르며 만난 동행 중의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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