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잃은 인권위. 김영훈 기자 ki myh@hani .co .k r
보수 위원, 민간인 사찰 안건에 “그게 뭔데요?”
의견 표명 잇달아 부결되고 민간위원들 사직도
의견 표명 잇달아 부결되고 민간위원들 사직도
지난 23일 밤늦게까지 이어진 국가인권위원회 전원위원회의 한 장면.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의혹에 대한 직권조사 안건을 논의하면서 보수 성향의 한 인권위원이 이렇게 말했다. “사실관계를 잘 알려주지 않아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자 다른 인권위원이 “한 달 넘게 민간인 사찰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웠는데 뉴스도 안 보느냐”고 따졌다. 또다른 인권위원도 “<한겨레> <경향>뿐 아니라 <조선> <동아> <중앙>과 <한국방송>(KBS)에서도 다 보도했다”고 꼬집었다. 진보와 보수, 정치적 성향을 떠나 인권 현안을 늘 주시해야 할 인권위원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인권위 안팎에서는 전원위원회의 이런 웃지 못할 풍경을 두고 코미디 프로그램인 ‘봉숭아 학당’에 빗대기도 한다.
인권단체들은 이런 인권위의 최근 결정이나 행보를 보며, 인권위의 존재 이유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임기 절반 만에 인권위의 기본 기능마저 마비됐다는 혹독한 비판도 나온다.
실제 인권위는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야간집회 금지와 관련해 헌재에 의견을 표명하는 걸 포기했고, 국가가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개인을 상대로 낸 명예훼손 소송에 대한 의견도 내지 않기로 했다. 지난 23일 전원위원회에서는 심각한 인권침해로 드러난 총리실 민간인 사찰 사건에 대한 직권조사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선 공직선거법 위헌심판과 관련된 의견 표명 안건도 부결됐다.
지난 주말엔 인권위 설립의 산증인 가운데 한 사람인 김형완 인권정책과장이 결국 사직서를 냈다. 그는 2001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법이 통과된 뒤 인권위 설립기획단에 참여해 기구의 역할과 방향을 ‘설계’했다. 김 과장의 사표에 대해 인권위 사무총장을 지낸 김칠준 변호사는 25일 “인권위의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인권위 안팎에선 ‘인권정책과장은 인권 현안을 모니터링하고 공권력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직책인데, 현병철 위원장 쪽에서 자꾸 제동을 거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인권위 관계자는 “인권 현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무산되는 상황을 보면서 스스로 치욕적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고 전했다.
인권위 활동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온 신수경 새사회연대 정책기획국장은 “이명박 정부 들어 인권위 흔들기와 힘빼기가 지속돼 애초 설립 취지가 무색해졌다”고 지적했다. 한 인권위원은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한 문제제기가 계속 제동이 걸리게 되면, 사무처에서도 아예 그런 인권 현안과 정책 관련 안건을 전원위원회에 상정하지 않게 된다”며 조직의 보수화를 경계했다.
실제로 인권위 사무처는 인권 관련 전문성이 있거나 시민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별정직 공무원들이 점차 배제되고 일반직 공무원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현 위원장은 지난 7월 인권 문제에 식견이 있는 외부 인사가 맡아온 사무총장직에 공무원 출신인 손심길 당시 기획조정관을 임명했고, 일부 민간 출신 직원들은 유학을 떠나거나 휴직을 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취임한 현 위원장은 그동안 인권단체와 단 한차례도 간담회를 연 적이 없다.
손준현 선임기자 dust@hani.co.kr
손준현 선임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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