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불광동 새장골경로당 코디네이터 전향온(왼쪽)씨와 조금옥씨가 지난 14일 어르신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최근 50, 60대 베이비붐 세대가 일터 밖으로 쏟아지고 있다. 길어진 기대수명에 불안감은 커지지만 개인도 사회도 막막하다. <한겨레>는 은퇴 뒤 삶의 새로운 방정식을 찾는 데 보탬이 되고자 ‘시니어’면을 신설했다. 이 방정식을 풀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전문가의 조언을 담는다.
외벌이 가장이었던 전향온씨
서울시 인생이모작 교육 받고
‘더 나은 경로당’ 만드는 활동
“고사리손으로 꽃 달아드리자”
인근 어린이집에 행사 제안
생기없던 어르신들, 웃음꽃 활짝
아나바다 장터도 의외로 인기
예기치 않은 순간에 1막이 끝나는 인생이 있다. 2001년 남편의 갑작스러운 사망. 장례식을 마치고 2막이 시작되자 전향온(57)씨는 중·고생 두 남매를 둔 외벌이 가장이 되었다. 복지관 조리사 월급으로는 교육비를 감당하기 힘겨웠다. 이듬해 복지관을 그만두고 서울시 홍은동에 호프집을 열었다. 10여년간 조리사로 일했지만 안줏거리는 다른 세계였다. 무엇보다 고객을 유치하고 취객을 상대하는 게 고역이었다. 1년 반 만에 손해를 보고 문을 닫았다. 초등학교 급식실에 조리사로 취업했다. 계약직이라 월급은 100만원에 불과했다. “이대론 미래가 없겠다”고 판단한 전씨는 퇴근한 뒤 공부를 시작했다. 주경야독으로 웃음치료강사 자격증을 땄고 2007년 명지전문대 사회복지과 야간과정에 입학했다. 2009년 건국대 사회복지학과 주말과정에 편입한 그는 4학년 때 실습을 나간 복지관에 계약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경로당을 ‘어르신 행복학습관’으로 전환하는 업무를 지원하며 어르신들과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2012년 웃음치료강사로 독립했다.
전씨와 조씨가 어르신들의 발을 마사지하고 있다. 조씨는 발마사지ㆍ간호조무사 등 복지 관련 자격증만 10여개를 갖고 있다.
복지관과 경로당 등에서 웃음치료 강의를 진행하며 월 100만~150만원을 벌었다. 들쭉날쭉한 수입에 불안하던 차에 서울인생이모작센터의 경로당 코디네이터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만 50살 이상’이라는 자격 조건이 먼저 눈에 띄었다. 구인광고에서 ‘미만’이라는 단어에 늘 좌절해온 전씨는 ‘이 일이 내 일이구나’ 확신했다. 경로당 코디네이터는 50, 60대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전 쌓은 경험과 능력을 지역사회의 자원과 연계해 경로당의 운영을 지원하는 일을 맡는다. 서울시가 관할하는 뉴딜일자리사업의 하나로 현재 어르신들의 사랑방 기능에 머물고 있는 경로당을 마을공동체와 교류를 통해 세대통합과 평생학습의 장으로 탈바꿈시키자는 게 목표다.
활동비는 월 40만원에 불과하지만 4대보험이 제공돼 최소한의 안전망을 확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월 60시간이라는 활동시간만 충족하면 세부시간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웃음치료강의와 병행이 가능한 덕분이다.
올 초 한 달간 직무교육을 받고 2월에 조금옥(61)씨와 한 조가 돼 서울 불광동 새장골경로당에 배치됐다. 70~90대 어르신들의 첫 반응은 차가웠다. “무슨 일로 온 거야?” “여기서 뭘 하자는 게지?” 낯선 이를 경계하는 어르신들의 홀대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몇몇 코디네이터는 그만두거나 다른 경로당으로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전씨는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먼저 다가섰다. 음식 준비, 설거지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도우며 마음의 빗장을 조금씩 열어갔다. 5월8일을 전환점으로 삼았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경로당 옆 어린이집에 제안해 어린이들이 직접 준비한 카네이션을 들고 경로당에 오도록 한 것이다.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슴에 꽃을 달아주고 준비한 노래와 율동으로 축하공연을 하자 어르신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배사순(90) 할머니는 “노인만 있던 경로당에 꽃 같은 아이들이 오니 환해서 정말 좋았다”고 그날을 기억했다.
전씨와 조씨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노인건강운동교실을 유치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런데 강사가 경로당으로 온 첫날 문제가 발생했다. 어르신들이 지원서에 자신의 주민번호 쓰기를 거부한 것이다. 노인 대상 사기에 휘말릴까 우려한 자녀들로부터 ‘주민번호는 절대 가르쳐줘선 안 된다’고 당부받은 어르신들은 완강했다. 이용자의 신상정보를 확보해야 한다는 공단 쪽 방침도 확고해 노인건강운동교실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간호조무사 자격증이 있는 조씨가 갖고 있던 장비를 가져와 어르신의 혈압과 혈당을 직접 측정하고, 전씨는 웃음치료강의를 하고 있다.
새장골경로당 어르신들이 가장 기다리는 행사는 매달 열리는 아나바다 장터다. 지난 7월 전씨가 지인한테서 기증받은 옷가지들을 어르신들께 어떻게 나눠드릴까 고민하다 나온 아이디어였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아나바다의 취지를 설명하고 장터를 열었는데, 의외로 어르신들의 호응이 컸다. 각자 마음에 드는 물품을 들고 희망가격을 이야기하고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이가 없으면 낙찰되는 경매 방식을 어르신들이 매우 재미있어한 것이다. 특히 돋보기, 무릎담요, 가방, 옷, 샴푸, 염색약 등이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아나바다 장터도 이번달로 끝이 난다. 경로당 코디네이터의 활동 기간이 10월까지기 때문이다. 내년에 활동할 코디네이터는 올 12월쯤 모집해서 내년 1월에 직무교육부터 받게 된다. 전씨와 조씨가 다시 뽑힐지, 새장골경로당으로 다시 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전씨는 “다시 온다고 해도 내년 초까지 3개월이나 비워야 하고, 9개월 동안 어르신들의 마음을 조금씩 열며 진행해온 일들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 아쉽다”며 “활동비와 4대보험이 제공되지 않아 생활도 다시 불안해지기 때문에 앞으론 업무가 이어지도록 개선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경로당 코디네이터 도전하세요
모집기간 2014년 12월(예정)
활동기간 2015년 1~10월 10개월 (직무교육 80시간 포함)
참여조건 만 50살 이상 서울시민
활동조건 월 60시간 활동, 활동비 월 40만원 지급, 4대보험 가입
활동내용 경로당 지역 여건과 인적자원 등 실태파악/ 지역 내 마을공동체 활동과 연계/ 노인여가환경 향상 위한 기회 발굴/ 경로당 활성화를 위한 지원
사업주체 서울시 어르신복지과
수행기관 서울인생이모작지원센터(www.seoulsenio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