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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여든 노모의 가르침 ‘무상하니 좋다’

등록 2014-10-28 20:12

시니어 통신
난 부자다. 최근에 이루었으니 벼락부자다. 부자여서 나날이 행복하다. 돈과 시간이 넉넉해서 절로 얻은 게 아니다. 지난해 2월 인생 이모작을 꿈꾸며 중등교사로 명예퇴직했지만, 1년 내내 예상 못한 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우두망찰하는 순간이 많았다. 일상에 잠복한 장애 요인들이 잇달아 나타나 잠조차 줄어 신경이 가늘어졌다. 앞이 보이지 않던 그 깜깜한 터널의 시간을 치열하게 통과하고 나니, 일상은 그저 반복적인 일과의 꾸러미가 아니었다. 그 속에 무궁무진한 우주와 접속할 관계들이 득실거렸다. 내가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땀내를 풍기며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변화하려는 연유다.

변화함이 그치지 않아 무상(無常)이다. 무상하니 좋다는 걸 깨달은 나는 분명 행운아다. 최고의 공로자는 함께 사는 여든 넘은 노모다. 들어앉은 나로 인해 졸지에 가사 통솔권을 빼앗겼다 여긴 노모의 서슬에 직면해 급기야 치를 떨지 않았다면 훨씬 늦게 알았을 테니. 노추로 몰아세우면서도 이해하려 애쓰자 평생 동거한 존재임에도 제대로 아는 바가 없음을 비로소 자인하던 순간, 이제까지 내 생은 허방을 짚은 꼴이었다. 툭하면 내뱉던 ‘더불어 삶’이 아니었다. 인격체로서 배려하며 주고받은 관계가 아니라 역할 위주로 이은 기능적 관계망에 옭혀 버둥대는 형상이었다. 그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던 동서양의 고전들이 일상이 무상의 텃밭임을 넌지시 일러주었다. 1년여의 분투 끝에 노모와 나는 자연스레 영역을 분담하고 알뜰하게 서로를 보살피며 지낸다.

은퇴 2년차인 지금, 일상은 무상하게 흐른다. 나는 웬만한 집수리를 포함해 집 안팎 허드렛일을 착착 해내어 동네 갑장 친구를 놀라게 한다. 아쉬워 전화하면 군말 없이 달려오는 얼굴들도 생겼다. 길에서 보면 먼저 반갑게 인사하는 동네 주민과 유초중고생이 많아졌다. 마음이 불편할 때 나와 얘기하면 속이 풀린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 그 변화들은 유동적이고자 애쓰는 ‘나’가 연기(緣起)의 바다를 향해 점점 더 멀리 물수제비를 떠 일으킨 파문이다. 인근 부동산중개업자들이 내가 사는 30년 넘은 주택을 ‘그 예쁜 집’이라 부른단다. 기꺼운 마음으로 집주인답게 오늘도 정중동(靜中動)으로 흐르련다.

김유경(55) 한겨레주주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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