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생활 등 삶의 궤적을 담은 이력서로 지난 7월 대기업 계열 요식업체 취업에 성공한 조성권씨.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빅이슈’ 판매원에서 요리사로
#1. 1980년 5월 전남도청 광장에 놓인 주검들
그들을 본 뒤로 광주의 평범한 재수생이었던 조성권(53)씨는 길을 잃었다. 총성과 동시에 허리가 꺾이던 대학생의 모습이 그를 지배했다. 대학에 다녀야 할 이유도,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전문대 졸업장만 대충 땄다.
방황하는 아들을 보며 속이 탄 부모는 결혼을 서둘렀다. 1986년 가장이 된 조씨는 이듬해 교보문고 광주점에 취업했다. 교보문고의 지방 대도시 동시 진출에 지역 서점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광주점은 개점 하루 만에 영업을 중지했다. 직원들은 서명운동을 하며 영업 재개만 기다렸지만 교보문고는 완전 철수를 결정했다. 그렇게 조씨는 첫 직장을 잃었고, 아내와의 불화가 시작됐다. 은행 지점장이었던 아버지의 소개로 1988년 주택은행 7급 서무원으로 입사할 수 있었지만 부부 사이는 나빠져만 갔다. 아내는 이혼에다 자녀 둘의 양육권까지 요구했다.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조씨는 집 대신 술집으로 퇴근했다. 은행에서는 구조조정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80년 광주에서 시작된 20대의 방황
가정불화에 해고까지 30대에 가출
노숙·고시원 전전한 40대의 절망 인생 #2. 1996년 10월 서울역 광장에 놓인 생활정보지 숙식까지 제공한다는 구인광고가 조씨 눈에 들어왔다. 은행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뒤 무작정 올라탔던 기차에서 막 내린 참이었다. 모든 연락을 끊고 가구공장의 ‘시다’(보조)가 되었다. 술·담배는 나날이 늘어갔다. 외환위기(IMF)가 닥치면서 가구공장, 사출공장 등을 전전했다. 체불된 5개월치 임금을 받으려 몇 달씩 공장 앞에서 술로 때우기도 했다. 현금이 다 떨어진 1999년 9월 대학로 서울대병원 응급실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장례식장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고, 을지로 지하철역에서 신문지를 덮고 자기도 했다. 이혼 판결이 확정된 사실도 신용불량자가 된 사실도 그제야 알았다. 이듬해 한 종합사회복지관의 도움으로 잠자리를 해결하고 건설현장 막노동도 시작했지만 부실해진 몸상태로 한 달에 7, 8일 이상 일하기 힘들었다. 2005년 8월에는 건설현장에서 쏟아진 쇠파이프에 발등뼈가 부러졌다. 간경화에 요추협착증까지 진단받자 노숙인 지원단체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되도록 도와줬다. 월 40만원 안팎의 수급비를 안정적으로 받게 되면서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막노동 대신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식당에서 요리를 배우고 싶어 ‘아라이’(설거지)로 들어갔지만 나이도 많고 체력도 약한 그가 버티기에 주방은 너무 험한 세계였다. #3. 2011년 5월 성남의 입시학원에 놓인 신문 밑바닥에서 ‘빅이슈’로 반등
신용회복지원받아 50대에 미래 꿈
올 1월 기초수급비 포기 ‘배수진’
‘노숙’ 이력서로 요식업체 취업 성공
사회적기업 ‘빅이슈코리아’에 대한 기사를 봤다. 노숙인이 잡지 <빅이슈>를 팔아 자활할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이 눈길을 잡았다. 1년 넘게 밤마다 학원 청소를 하며 월 40만원을 받고 있을 때였다. 다음날 바로 빅이슈코리아 사무실을 방문해 잠실역 8번 출구를 배정받았다. 3000원짜리 잡지 한 권을 팔면 1600원을 벌 수 있었다. 1991년 영국에서 시작한 글로벌기업의 영업사원이라는 자부심도 들었다. 조씨는 매일 판매량을 수첩에 기록하고 판매 목표도 늘려 잡았다. 요일별·시간대별 판매 추이에 따라 근무시간을 조정하며 의욕적으로 팔았다. 663권을 팔아 100만원 넘게 번 달도 있었다. 자원봉사로 함께해준 판매도우미 네 명의 응원도 큰 힘이 되었다. 2011년 8월에는 7000만원까지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채무를 1300여만원으로 조정받았다. 빅이슈코리아에서 신용회복 관련 법률지원을 해준 덕분이었다. 빚 갚기는 엄두도 못 냈던 조씨가 매달 11만4000원씩 상환하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미래’와 ‘요리사’라는 단어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식당 일자리가 생기면 즉시 달려갔지만 오래 버티질 못했다. 그가 돌아올 때마다 빅이슈코리아는 아무 말 없이 맞아줬다.
2014년 새해를 맞이한 조씨는 요리사 꿈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배수진을 쳤다. 기초생활수급자 해제 신청을 한 것이다. 수급비에 의존하는 나약한 마음부터 다잡기 위해서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구인광고를 찾아 ‘초보 가능’이라고 적힌 곳에 전화를 걸어 면접에 나섰다. “빠진 앞니부터 해 넣고 난 뒤에 면접을 보라”는 면접관도 있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노숙생활과 <빅이슈>판매원 경험도 이력서에 다 적었다. “이력서에 뭐 이런 것까지 썼느냐”는 질문에는 “스펙 대신 삶의 궤적을 보여주고 싶다”고 대답했다. 한없이 솔직해지자 결실이 있었다. 2월 노량진의 프랜차이즈 주점에 이어 7월부터 기업체·대학의 구내식당을 운영하는 대기업 자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조리 전에 식기를 세척하고 식자재를 손질하는 전처리 담당이다. 한 달에 6일밖에 못 쉬고, 월급은 120여만원에 불과한 시간제 노동자지만 그는 행복하다.
“요리사라는 길을 가기 위해서 기초부터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급여에 대한 욕심은 내려놓았습니다. 남들은 20대에 취업해 30년간 직장생활을 하는데, 50대가 되어서야 진로를 찾았으니 80대까지 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행에서 일하다 인생의 맨 밑바닥까지 떨어져봤으니 앞으로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나만의 식당을 열어 나처럼 어려운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가정불화에 해고까지 30대에 가출
노숙·고시원 전전한 40대의 절망 인생 #2. 1996년 10월 서울역 광장에 놓인 생활정보지 숙식까지 제공한다는 구인광고가 조씨 눈에 들어왔다. 은행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뒤 무작정 올라탔던 기차에서 막 내린 참이었다. 모든 연락을 끊고 가구공장의 ‘시다’(보조)가 되었다. 술·담배는 나날이 늘어갔다. 외환위기(IMF)가 닥치면서 가구공장, 사출공장 등을 전전했다. 체불된 5개월치 임금을 받으려 몇 달씩 공장 앞에서 술로 때우기도 했다. 현금이 다 떨어진 1999년 9월 대학로 서울대병원 응급실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장례식장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고, 을지로 지하철역에서 신문지를 덮고 자기도 했다. 이혼 판결이 확정된 사실도 신용불량자가 된 사실도 그제야 알았다. 이듬해 한 종합사회복지관의 도움으로 잠자리를 해결하고 건설현장 막노동도 시작했지만 부실해진 몸상태로 한 달에 7, 8일 이상 일하기 힘들었다. 2005년 8월에는 건설현장에서 쏟아진 쇠파이프에 발등뼈가 부러졌다. 간경화에 요추협착증까지 진단받자 노숙인 지원단체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되도록 도와줬다. 월 40만원 안팎의 수급비를 안정적으로 받게 되면서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막노동 대신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식당에서 요리를 배우고 싶어 ‘아라이’(설거지)로 들어갔지만 나이도 많고 체력도 약한 그가 버티기에 주방은 너무 험한 세계였다. #3. 2011년 5월 성남의 입시학원에 놓인 신문 밑바닥에서 ‘빅이슈’로 반등
신용회복지원받아 50대에 미래 꿈
올 1월 기초수급비 포기 ‘배수진’
‘노숙’ 이력서로 요식업체 취업 성공
2011년 5월부터 1년6개월간의 <빅이슈> 판매원 생활은 조성권씨가 사회로 나가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빅이슈코리아 제공
잡지 <빅이슈> 판매원이 되려면
자격 쪽방, 고시원, 쉼터, 노숙 등 주거취약계층
조건 자립 의지
행동수칙 :
① 배정받은 장소에서만 판매
② <빅이슈> 아이디(ID)카드와 복장을 착용하고 판매
③ 미소를 지으며 당당히 고개를 들고 판매
④ 술을 마신 뒤 <빅이슈>를 판매해서는 안 됨
⑤ 흡연 중 <빅이슈>를 판매해서는 안 됨
⑥ 판매 중 시민의 통행을 방해해서는 안 됨
⑦ 이웃인 길거리 노점상과 다투지 않고 협조
⑧ 활동기간에는 <빅이슈>만 판매해야 함
⑨ 긴급상황에는 반드시 빅이슈코리아로 연락
⑩ 판매수익금 중 50%는 저축해야 함
연락처 (02)2069-1135 빅이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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