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사회적기업 은빛둥지의 라영수 교육원장(오른쪽)과 직원들이 지난달 29일 서울 남산한옥마을에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촬영지인 엔(N)서울타워를 촬영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디지털 영상 전문가 라영수씨
1997년 한보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우성과 삼미가 도산하고 진로·건영·대농·한신공영이 잇따라 퇴출됐다.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를 접은 국외 투자자들은 원화를 기피했다. 외환위기가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된 그해 11월, 한국은 외화 유동성 부족으로 국가부도 상황에 직면한다. 당시 캄보디아에 있던 라영수(74) 한국캄보디아농업개발공사 한국측 대표도 부도 상황에 내몰렸다. 대규모 농업을 위해 캄보디아의 한 지방자치단체와 농업개발사업을 합작하면서 모든 계약을 달러 기준으로 맺어둔 상태였다. 달러 환율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자 야심찼던 ‘일생의 사업’은 순식간에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연말에 귀국한 그는 한 달 동안 술만 마셨다. 문득 ‘이렇게 죽을 바엔 하고 싶은 공부나 하고 죽자’는 생각이 들어 근처 안산공과대(지금 신안산대)를 무작정 찾아갔다. 교수들에게 “신기술인 디지털을 배우고 싶다”고 사정해 청강을 허락받았다. 경기도 안산시 인근에는 반월·시화공단이 있어 야간수업이 많았다. 아침부터 도시락 두 개를 싸들고 가서 12개 과목을 밤늦게까지 청강했다. 워드프로세서만 입력하는 수준이던 그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설계를 하는 캐드(CAD) 프로그램을 배운 지 두 달 만에 관련 특허를 출원했다.
“캐드를 배운다고 해서 컴퓨터의 원리까지 다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니거든. 이렇게 두 점을 찍으면 선이 그려진다는 것만 알면 되더라고. 그 경험을 요즘 잘 써먹고 있어. 영어가 두려워 컴퓨터 배우기를 겁내는 노인들한테 이렇게 얘기하지. ‘영어가 아니라 알파벳으로 적힌 기호일 뿐’이라고 말이야.”
외환 위기 때 도산 아픔 잊으려 대학 청강
디지털 배운 지 두달 만에 특허 출원
대학생들과 벤처 창업끝 세대차로 포기 늦깎이 수강생들과 만든 컴퓨터 동아리
디지털영상 제작 사회적기업으로 성장
영상기술로 한류 관광 서비스도 개발 중
노인도 쉽게 익히는 일자리 만들고파 2000년부터 벤처 붐이 일기 시작했다. 대학생 3명과 ‘밀레니엄 이미지스’라는 벤처기업을 만들었다. 멀티미디어 자서전 사업을 시작했지만, 젊은이들과의 동업은 쉽지 않았다. 의견 차이로 1년 만에 사업에서 발을 뺐다. 마을로 관심을 돌린 그는 새로 생긴 복지관에 노인을 위한 컴퓨터교실을 제안했다. 노인에게 컴퓨터를 가르쳐본 강사가 없어 자신이 강의까지 떠안았다. 2001년 6월 27명의 수강생을 대상으로 3개월짜리 강좌를 시작했다. 강좌를 마칠 무렵 아쉬운 수강생들이 “책임져라”라며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들과 함께 노인 컴퓨터 동아리 ‘은빛둥지’를 만들고, 안산시의 지원을 받아 빈 건물 2층에 둥지를 틀었다. 이듬해 제1회 경기도실버정보화경연대회 대상과 제1회 전국노인정보검색대회 금상을 차례로 수상한 은빛둥지는 안산시 본오1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정규수업을 시작했다. 당시 노인을 위한 컴퓨터 교재는 한국정보문화진흥원에서 제작한 게 유일했다. 교재의 최고 목표는 ‘손자들과 메일 주고받기’. 노인이라도 메일에 사진과 동영상 정도는 첨부할 줄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은빛둥지는 자체적으로 교재를 만들고 2005년 디지털카메라반, 이듬해 디지털영상반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미디액트 등 진보적인 영상단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서울영상미디어센터와 전국미디어센터협의회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게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경기문화재단의 ‘영정사진 찍기’, 여성가족부의 ‘할머니도 동영상 할 수 있다’ ‘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영상교육’ 등 각종 사업을 수주했다. 운영비를 벌기 위해서다. 운영비의 대부분은 식비다. 은빛둥지는 동아리라기보다 생활공동체에 가깝다. 회원들이 온종일 함께 생활하며 점심과 저녁, 두 끼 식사를 같이 해 먹는다. 밥을 함께 먹으니 ‘식구’(食口)다. 현재 월회비 1만원씩 내는 정회원만 178명이다. 두 달 이상 배운 회원까지 합치면 6000여명이다. 각종 영화제와 사진전에서 개인이 수상하더라도 상금은 전액 운영비로 내놓는다. 함께 생활하며 공부했으니 공동작품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다. 은빛둥지는 본격적인 사업을 위해 같은 이름의 사회적기업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2009년 예비 사회적기업을 거쳐 지난해 고용노동부로부터 사회적기업으로 인증받은 은빛둥지는 2010년 이후 연매출 1억원을 유지하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한국정보화진흥원·국가평생교육진흥원·희망제작소의 홍보영상을 제작했고, 다큐멘터리영화 등 영상물을 만들어 지상파, 지역 케이블방송에 방영해왔다. 이를 위해 2006년부터 매년 두 번씩 국외 로케이션도 떠난다. 2008년 완성한 다큐멘터리 <잊혀진 독립운동가 염석주를 찾아서>엔 지역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는 3년간의 과정이 담겨 있다. 은빛둥지 회원들은 전국을 헤매며 증언을 수집했고 전국 각지의 사료관을 찾아 자료를 모았다. “영화를 제작하는 이유는 노인들의 정신을 담기 위해서야. 아날로그였다면 노인들이 이렇게 쉽게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지 못했겠지. 예전엔 필름 값이 비싸니 함부로 찍어댈 수가 있나. 오랜 시간 숙련을 거친 기술자만 찍을 수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2008년 제2회 서울노인영화제에서 <나의 망초 이야기>로 대상을 타신 조경숙 여사는 여든다섯 살에 손가락이 두 개밖에 없으셔.” 사회적기업 은빛둥지는 영상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관광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별에서 온 그대>나 <겨울연가> 등 한류 드라마의 촬영지 영상과 가상 스튜디오에서 관광객이 찍은 영상을 합성해 기념 영상물을 제공하는 서비스가 바로 그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올해 4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한 ‘제4회 창조관광사업 공모전’에서 입상작으로 선정됐다. 내년 4월까지 사업비 3000만원을 지원받게 된 은빛둥지는 <별에서 온 그대>의 촬영지였던 인천 채석장과 인천대, 서울 남산 엔(N)타워 촬영까지 마쳤다. “가상 스튜디오의 진짜 목표는 전국 관광지마다 노인 일자리를 만드는 거지. 사회적기업 은빛둥지의 직원이 10명인데 급여를 100만원 이상 받거든. 대부분 10년 이상 공부하긴 했는데 우리가 잘나서 성공한 것만은 아니지. 시민단체의 도움과 사회의 인프라 덕분 아닌가. 우리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줄여서 노인도 1년만 배우면 쉽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고 싶어.”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디지털 배운 지 두달 만에 특허 출원
대학생들과 벤처 창업끝 세대차로 포기 늦깎이 수강생들과 만든 컴퓨터 동아리
디지털영상 제작 사회적기업으로 성장
영상기술로 한류 관광 서비스도 개발 중
노인도 쉽게 익히는 일자리 만들고파 2000년부터 벤처 붐이 일기 시작했다. 대학생 3명과 ‘밀레니엄 이미지스’라는 벤처기업을 만들었다. 멀티미디어 자서전 사업을 시작했지만, 젊은이들과의 동업은 쉽지 않았다. 의견 차이로 1년 만에 사업에서 발을 뺐다. 마을로 관심을 돌린 그는 새로 생긴 복지관에 노인을 위한 컴퓨터교실을 제안했다. 노인에게 컴퓨터를 가르쳐본 강사가 없어 자신이 강의까지 떠안았다. 2001년 6월 27명의 수강생을 대상으로 3개월짜리 강좌를 시작했다. 강좌를 마칠 무렵 아쉬운 수강생들이 “책임져라”라며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들과 함께 노인 컴퓨터 동아리 ‘은빛둥지’를 만들고, 안산시의 지원을 받아 빈 건물 2층에 둥지를 틀었다. 이듬해 제1회 경기도실버정보화경연대회 대상과 제1회 전국노인정보검색대회 금상을 차례로 수상한 은빛둥지는 안산시 본오1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정규수업을 시작했다. 당시 노인을 위한 컴퓨터 교재는 한국정보문화진흥원에서 제작한 게 유일했다. 교재의 최고 목표는 ‘손자들과 메일 주고받기’. 노인이라도 메일에 사진과 동영상 정도는 첨부할 줄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은빛둥지는 자체적으로 교재를 만들고 2005년 디지털카메라반, 이듬해 디지털영상반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미디액트 등 진보적인 영상단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서울영상미디어센터와 전국미디어센터협의회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게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경기문화재단의 ‘영정사진 찍기’, 여성가족부의 ‘할머니도 동영상 할 수 있다’ ‘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영상교육’ 등 각종 사업을 수주했다. 운영비를 벌기 위해서다. 운영비의 대부분은 식비다. 은빛둥지는 동아리라기보다 생활공동체에 가깝다. 회원들이 온종일 함께 생활하며 점심과 저녁, 두 끼 식사를 같이 해 먹는다. 밥을 함께 먹으니 ‘식구’(食口)다. 현재 월회비 1만원씩 내는 정회원만 178명이다. 두 달 이상 배운 회원까지 합치면 6000여명이다. 각종 영화제와 사진전에서 개인이 수상하더라도 상금은 전액 운영비로 내놓는다. 함께 생활하며 공부했으니 공동작품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다. 은빛둥지는 본격적인 사업을 위해 같은 이름의 사회적기업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2009년 예비 사회적기업을 거쳐 지난해 고용노동부로부터 사회적기업으로 인증받은 은빛둥지는 2010년 이후 연매출 1억원을 유지하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한국정보화진흥원·국가평생교육진흥원·희망제작소의 홍보영상을 제작했고, 다큐멘터리영화 등 영상물을 만들어 지상파, 지역 케이블방송에 방영해왔다. 이를 위해 2006년부터 매년 두 번씩 국외 로케이션도 떠난다. 2008년 완성한 다큐멘터리 <잊혀진 독립운동가 염석주를 찾아서>엔 지역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는 3년간의 과정이 담겨 있다. 은빛둥지 회원들은 전국을 헤매며 증언을 수집했고 전국 각지의 사료관을 찾아 자료를 모았다. “영화를 제작하는 이유는 노인들의 정신을 담기 위해서야. 아날로그였다면 노인들이 이렇게 쉽게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지 못했겠지. 예전엔 필름 값이 비싸니 함부로 찍어댈 수가 있나. 오랜 시간 숙련을 거친 기술자만 찍을 수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2008년 제2회 서울노인영화제에서 <나의 망초 이야기>로 대상을 타신 조경숙 여사는 여든다섯 살에 손가락이 두 개밖에 없으셔.” 사회적기업 은빛둥지는 영상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관광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별에서 온 그대>나 <겨울연가> 등 한류 드라마의 촬영지 영상과 가상 스튜디오에서 관광객이 찍은 영상을 합성해 기념 영상물을 제공하는 서비스가 바로 그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올해 4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한 ‘제4회 창조관광사업 공모전’에서 입상작으로 선정됐다. 내년 4월까지 사업비 3000만원을 지원받게 된 은빛둥지는 <별에서 온 그대>의 촬영지였던 인천 채석장과 인천대, 서울 남산 엔(N)타워 촬영까지 마쳤다. “가상 스튜디오의 진짜 목표는 전국 관광지마다 노인 일자리를 만드는 거지. 사회적기업 은빛둥지의 직원이 10명인데 급여를 100만원 이상 받거든. 대부분 10년 이상 공부하긴 했는데 우리가 잘나서 성공한 것만은 아니지. 시민단체의 도움과 사회의 인프라 덕분 아닌가. 우리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줄여서 노인도 1년만 배우면 쉽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고 싶어.”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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