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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풍진 세월 가슴속 응어리 시로 쓰는 ‘희망찬가’

등록 2014-12-02 20:05

지난달 20일 경기도 군포시 여성회관 2층에서 시화전을 열고 있는 한글교실 할머니들이 진효임 시인이 들고 있는 시집 <치자꽃 향기>를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다
지난달 20일 경기도 군포시 여성회관 2층에서 시화전을 열고 있는 한글교실 할머니들이 진효임 시인이 들고 있는 시집 <치자꽃 향기>를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다
한글교실 할머니 시인들의 만남
‘없는 집에 시집와서/ 고생도 많이 하고 허둥지둥 살다보니/ 삼십 고개 되었구나/ 자식 낳아 키우는데 정신없이 살아왔네/ 사십 고개 들어서니 자식들 출가시켜/ 오십 고개 넘어오니 자식들 행복하게 사는 모습/ 육십 고개 들어서니 무거운 짐 내려놓고 가볍게 걷고 있네/ 칠십 고개 올라서니 아픈 데는 많아지고/ 팔십 고개 들어서니 허망하기 짝이 없네//’(이해옥 <세월> 중에서)

지난달 20일 경기도 군포시여성회관 2층에선 한글교실의 시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여성회관에서 한글을 배우고 있는 할머니들이 직접 쓴 시를 전시한 것이다. 먼저 떠난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누구 엄마로 살다 처음으로 이름이 불렸을 때의 느낌 등을 오롯이 담았다. 한글교실의 시화전은 매년 이맘때 열리곤 했지만 대부분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자작시를 전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글교실을 10년 이상 지도하고 있는 장은아 독서지도사는 “지난해부터 진효임(73) 시인의 시집 <치자꽃 향기>를 교재로 시를 공부했다. ‘진효임 할머니는 일흔에 한글 공부를 시작해서 3년 만에 시집을 냈다’고 소개했더니 한글교실 할머니들도 자극을 많이 받은 것 같더라. 시를 공부하다 ‘우리도 한 번 써보자’고 해서 올해는 자작시로 시화전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한글교실은 초급과정 30명, 중급과정 30명으로 이뤄져 있다. 한글을 겨우 읽고 쓰는 초급과정의 할머니들은 처음엔 시 쓰기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진효임 할머니의 시를 계속 읽으며 스스로 깨쳐갔다. 혼자 외롭게 살며 남편으로부터, 자식으로부터 버림받은 감정을 단어와 문장에 담으며 밖으로 흘려보내는 할머니도 있었다. 밖에서는 글을 모르는 게 부끄러웠지만, 한글반에 오면 마음을 나눌 동료가 있기에 두려움을 조금씩 떨치며 자신의 이야기를 더듬더듬 써나갔다.

진효임 시인의 처음도 마찬가지였다. 한글교실의 특별강의 요청으로 이날 군포시여성회관을 찾은 시인은 자신 때문에 다른 할머니들이 시를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격했다.

“칠순에 복지관 한글교실에 처음 들어가서는 남들이 알까 부끄러워 교실 제일 구석에 앉았답니다. 그때 배웠던 시가 99세에 첫 시집을 낸 일본의 할머니 시인 시바타 도요의 작품이었어요. 그분 때문에 나도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노년에 배우는 한글로 시쓰기 도전
군포여성회관 할머니들 시화전 개최

일흔에 한글 배워 3년 만에 시집 내고
우수문학도서에 뽑힌 진효임씨 특강

부끄러운 과거도, 한 맺힌 넋두리도
일기처럼 시로 토해내고 자신감 찾아
“누구나 가슴속에 시가 있다” 응원

일기처럼 매일 시를 썼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둔 뒤 6남매 엄마로 살아온 풍진 세월과 절절한 자식 사랑을 시에 담았다. 맞춤법이 틀린 단어를 고쳐 쓰느라 지우개가 며칠을 못 버텼다. 하루는 청소하던 남편이 “무슨 때를 거실에 잔뜩 벗겨놓았냐”고 투덜댈 정도였다. 1년이 지났을 때 맞춤법 시험에서 처음으로 100점을 받았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손녀가 직접 상장을 만들어 선물로 줬다. ‘이 학생은 평소 열심히 공부하고 받아쓰기에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기에 상장을 드립니다.’ 평생 처음 받은 상장에 진효임 할머니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특강이 끝난 뒤 진효임(왼쪽) 시인과 한글교실 할머니들이 서로 안으며 격려하고 있다.
특강이 끝난 뒤 진효임(왼쪽) 시인과 한글교실 할머니들이 서로 안으며 격려하고 있다.
우연히 시를 읽은 가족들의 권유로 2012년 시집 <치자꽃 향기>를 낼 때도 무척 망설였다. 자신이 무식하다고 세상에 알리는 꼴이니 자식들한테 누가 될까 걱정도 됐다. 6남매를 키웠지만 서류를 읽고 쓰는 게 두려워 학교를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던 그였다. 막상 시집이 나온 뒤에는 주위의 수군거림에 속이 상했다. ‘자식들이 대신 시를 써줬다더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런 마음고생은 독자들의 전화에 씻겨나갔다. 마트에서 일한다는 한 아주머니는 “돌아가신 엄마의 세월을 담은 것 같아 힘들 때마다 이 시집을 읽는다”며 고마워했다. <치자꽃 향기>가 문화부의 ‘2012년 4분기 우수문학도서’에 선정돼 명예도 회복했다.

그 뒤로 여러 곳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와 자연스럽게 ‘시 전도사’가 되었다. 서투른 강의지만 또래 노인들의 반응은 남달랐다. 지난해 서울 중랑구의 한 야학에서 70여명의 노인을 대상으로 강의를 마쳤을 때였다. 한 할머니가 다가와서는 시인을 안고 ‘나 같은 사람도 시를 쓸 수 있냐’며 울었다. 시인도 그 마음이 느껴지고 고마워서 마주 안았다.

시로 자신감을 찾은 진효임 할머니는 요즘 복지관에서 문화센터로 활동 폭을 넓혔다. 컴퓨터도 배우고, 노래도 배운다. 치매에 좋을까 시작한 학습이 이제 즐기는 단계로 나아갔다. 딸한테 부탁하던 컴퓨터 입력 작업도 직접 할 수 있게 되었다.

‘환갑 막 지난 막내 동서 찾아와/ 컴퓨터에 쓴 내 일기를 보고 하는 말,// “형님, 이거 형님이 정말 한 거요?”// 인정 않는 말이지만/ 나는 그 말도 서운하지 않고 기분이 좋았네.// 동서야, 이 성님 가방끈 짧다고 우세 마소./ 나 이제 컴퓨터로 이메일도 보내고, 시도 쓸 줄 안다네.’(‘컴퓨터 할머니’ 중에서)

주말농장처럼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내년에 두 번째 시집을 내야 해서 마음만 바쁘다. 첫 시집에서 ‘여든에 세 번째 시집을 내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미룰 수도 없다.

“우리는 마음에 있는 거 그대로 쓰면 됩니다. 여러분이 쓰신 시를 읽었는데, 진심이 담겨진 작품이 많아 놀랐어요. 그래요. 누구나 가슴속에 시가 있습니다. 저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니 글로 써봅시다. 맞춤법 좀 틀리면 어때요. 지우고 쓰고, 지우고 또 쓰면 돼요.”

군포/글·사진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내 가슴 속의 시를 표현해보세요

1. 짧고 쉬운 시를 골라 글자를 배워 가며 자연스럽게 외운다.

2. 가요나 가곡으로 옮긴 익숙한 시를 자주 부르며 운율을 느낀다.

3. 시를 읽으며 떠오르는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4. 생활시나 자연시를 읽으며 삶 속에서 소재를 찾는다.

5. 맞춤법에 얽매이지 않고 써 본다.

6. 내 주변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찰해 본다.

7.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8. 나만의 시 노트를 만들어 떠오를 때마다 메모하듯 꾸준히 써 본다.

9. 이제까지 살아온 나의 삶이 한 편의 시라고 생각하고 솔직하게 쓴다.

10.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해 본다.

자료: 장은아 독서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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