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무(오른쪽)씨가 지난해 3월 경기도 부천시 시니어행복디자인센터에서 독거노인생활관리사를 대상으로 치매예방법을 강의하고 있다. 이헌무씨 제공
치매돌봄협동조합 만든 이헌무씨
1997년 외환위기는 많은 가장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생활고와 실직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의 소식이 연일 지면을 메웠다. 그해 크리스마스, 이헌무(67)씨도 자살을 고민하며 울산의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28년간 일궈온 펌프회사가 한순간에 부도났지만, 고등학생 딸이 “기숙사비 8만원이 필요하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던 전날까지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수중에 3000원이 전부이고, 8만원을 마련할 방법이 전혀 없음을 깨닫는 순간, 수억원 자금을 운용하던 자신이 바닥까지 추락했음에 절망했다. 자살을 결심하고 집을 나섰지만 삶을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26일 새벽 4시 가판대 생활정보지에서 정수기 방문판매원 구인광고를 봤다. 그때부터 신문배달, 대리운전기사 등 10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외환위기에 펌프회사 부도나 절망
판매원·신문배달·대리운전 전전
복지시설 운전기사때 노인문제 관심 노인상담사·케어기버 10년활동에
치매예방·조기치료 중요성 깨달아
오래도록365협동조합 14일 설립 “은퇴자 자원봉사 치매 예방에 좋아” 2000년에는 울산의 복지시설에 운전기사로 들어갔다. 시내 경로당을 돌며 어르신들을 아침에 시설로 모셔왔다 저녁에 데려다드리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어르신과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면서 노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05년부터 경기도 부천의 시니어클럽과 경기도 실버인력뱅크 등에서 각종 교육과정을 이수한 뒤 노인일자리 모니터요원과 노인상담사로 활동했다. 2006년에는 글로벌 요양서비스 업체인 홈인스테드가 한국에 진출했다. 이씨는 서류심사와 면접을 거쳐 노인 돌봄 전문인력인 ‘케어기버’(care giver)로 뽑혔다.
“저는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고 30년이 넘게 사회복지와 무관한 일을 해왔는데, 자꾸 어르신들과 관련한 일을 하게 되더군요. 자연스럽게 노인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홈인스테드코리아가 케어기버를 뽑으면서 1기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회사가 지난해 한국에서 철수했지만, 쿠웨이트·캐나다·인도 등에서 온 외국인 환자들과 경험도 많이 쌓을 수 있었습니다.”
이씨는 한 해에 300건이 넘는 노인 문제 상담을 하며 치매에 관심을 갖게 됐다. 치매 환자의 가족들이 겪는 고통은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했다.
“치매는 마라톤 경기와 같습니다. 마라톤을 완주하려면 코스에 대한 정보와 자신의 운동 능력, 지구력에 대해 잘 알아야겠지요. 마찬가지로 치매라는 병과 환자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가족들도 끝까지 건강하게 함께할 수 있습니다.”
치매를 예방하고 조기에 발견하자는 취지에서 2007년에는 치매조호관리협의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치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부하고 정보를 나누었다. 이 모임을 중심으로 치매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협동조합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이 구상은 2013년 서울시가 개최한 ‘서울 시니어 페스티벌’ 행사 중 시니어와 청년의 협동조합 아이디어 회의인 ‘유쾌한 시청 작당’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현재 한국에서 치매 환자는 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물리적 장애가 아니라 인지적 장애이기 때문입니다. 치매 등급이 따로 있는데, 치매 경증 진단자나 노인성 질환자처럼 장기요양 등급을 받지 못하는 환자는 집에서 가족들이 직접 돌봐야 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아요. 그래서 치매 돌봄 관리사를 양성하는 협동조합을 만들어 치매 전문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씨는 치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10여명과 함께 1년여의 준비 끝에 지난해 말 ‘오래도록365협동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했고, 14일 서울시 은평구에 설립신고까지 마쳤다. 이씨는 부이사장을 맡았다.
오래도록365협동조합이 가장 앞세우는 문장이 ‘치매를 2년만 일찍 발견해도 가족과 20년을 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사자는 대부분 자신이 치매임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징조를 가장 먼저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함께 사는 가족이다. 하지만 병원에 가서 치매진단을 받을 정도면 이미 악화된 상태라 환자와 가족들은 20년 이상 고통스러운 마라톤 경기에 나서게 된다. 세심한 관찰을 통해 치매 조짐을 2년만 일찍 알아차려도 심각한 악화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노인과 그 가족에 대한 사전 예방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전국에 마을회관과 노인정이 6만개나 있습니다. 그곳에 치매 돌봄 관리사가 가서 치매에 대한 교육과 상담을 한다면 치매를 조기에 발견하고 예방할 수 있어 사회적 건강도 증진할 수 있고 국가가 부담해야 할 의료비용도 절감할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시니어에 대한 고용도 창출하는 효과가 있고요.”
치매 예방을 위해 이씨가 은퇴자에게 가장 추천하는 방법은 자원봉사와 같은 사회적 활동이다. 5명 이상 모이는 곳에 주 2회 이상 가는 게 치매 예방에 좋은데, 평소에 사람 만나는 걸 즐기는 사람도 한 주에 5명 넘게 만나는 건 쉽지 않기 때문에 자원봉사 활동을 하라는 것이다. 또한 “노후에 직업을 갖는 것도 치매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솔직히 나이가 들면 젊을 때처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제 경험상 자녀들 출가시킨 뒤에는 한 달에 100만원만 있으면 고령 부부가 살아가는 데 별문제가 되지 않아요. 당장 번듯한 직업을 찾기보다 경력이나 재능을 기부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치매 예방을 위해서라도 말이죠.”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판매원·신문배달·대리운전 전전
복지시설 운전기사때 노인문제 관심 노인상담사·케어기버 10년활동에
치매예방·조기치료 중요성 깨달아
오래도록365협동조합 14일 설립 “은퇴자 자원봉사 치매 예방에 좋아” 2000년에는 울산의 복지시설에 운전기사로 들어갔다. 시내 경로당을 돌며 어르신들을 아침에 시설로 모셔왔다 저녁에 데려다드리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어르신과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면서 노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05년부터 경기도 부천의 시니어클럽과 경기도 실버인력뱅크 등에서 각종 교육과정을 이수한 뒤 노인일자리 모니터요원과 노인상담사로 활동했다. 2006년에는 글로벌 요양서비스 업체인 홈인스테드가 한국에 진출했다. 이씨는 서류심사와 면접을 거쳐 노인 돌봄 전문인력인 ‘케어기버’(care giver)로 뽑혔다.
15일 서울시 종로구 도심권인생이모작지원센터에 이헌무(가운데)씨 등 오래도록365협동조합 조합원들이 모였다. 원낙연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