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은퇴한 뒤 줄어든 소득에 맞춰 씀씀이를 줄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와 아이들이 씀씀이를 줄여야 하는 처지를 놓고 자꾸 투덜댑니다. 평생 가장으로서 남부럽지는 않더라도 중간은 한다고 여겼는데, 은퇴하고 나니 초라하게 느껴져 가족에게도 자꾸 화를 내게 됩니다. 씀씀이를 즐겁게 줄이는 방법이 없을까요?
A: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소비와 관련된 우리의 일상을 표현하는 말로 이보다 더 적나라한 것이 있을까요. 교육방송(EBS)의 <다큐프라임>에서 조명했듯이 사람을 ‘호모 컨슈머리쿠스’라고 정의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아침에 눈을 떠 다시 잠이 들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를 합니다. 우리는 소비하므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본질적으로 소비란 사람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위입니다. 즉 사람이 주체이고 여러 소비재들의 가치와 용도에 따라 필요와 욕구에 맞춰 상품을 선택하는 행위가 소비죠. 그런데 우리는 진짜 주체적으로 상품을 선택하고 있을까요? 상품의 가치와 용도를 평가하고 우리의 필요와 욕구를 성찰하고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극성 소비자가 아니라도 우리는 이미 사람이 소비의 주체가 아니라 광고와 마케팅에 의해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지 않나 의심해볼 만한 광경을 자주 접합니다. 소비를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믿거나, 타인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마치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새 제품이 끊임없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상품의 가격이나 브랜드에 의해 우쭐해하거나 주눅이 드는 현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
이와 같은 소비주의 사회에서 줄어든 소득에 맞춰 씀씀이를 줄여야 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운 형벌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이러한 소비에 대한 스스로의 박탈감은 광고와 마케팅이 만들어놓은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필요와 욕구에 맞춰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소비가 아니라 광고와 마케팅이 우리의 뇌에 과학적으로 자극함으로써 만들어낸 허상의 욕망이라는 거죠. 이를 극복하고 벗어나는 길이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와 욕구가 자신이 주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외부 자극으로 창출된 것이라면 의도적으로 자극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소비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소비하므로 존재한다는 표현처럼 소비 수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는 모습이 긴장된 소비를 해야 하는 현실보다 더욱 코믹한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소득이 줄었기 때문에 씀씀이도 줄여야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그동안 불필요한 소비를 해왔던 것은 없는지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