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통신
나는 3남1녀 중 첫째다. 부모님이 가장 믿고 의지하던 첫아들이 7년 전 훌쩍 제주도로 이사를 와버렸다.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두 분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자식들도 부모님이 사시는 안양을 떠났다. 셋째는 안산으로 이사를 했고, 재작년 말에 결혼한 막내는 대전으로 집을 옮겼다. 여동생은 안양에 남았지만 먹고사는 일에 급급해 자주 찾아뵙지 못한다.
늘 그렇기는 했지만 제주로 이주하면서 더 자주 전화를 드렸다. 하루에 두 번, 정신없이 바쁠 때도 하루에 한 차례씩 꼭 전화를 드렸다. 딱히 할 말이 없을 때는 손녀 다향이의 목소리라도 듣게 하면서 말이다. 자식들이 다 떠나고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장을 보러 다니신다고 했다. 젊은 날부터 좋지 않았던 무릎 상태가 점점 나빠진 어머니가 집 안에서도 지팡이를 짚고 다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끔 찾아뵈면 어머니는 싱크대에 두 팔꿈치를 의지한 채 설거지를 하고, 어린애처럼 기어다니면서 걸레질을 하셨다. “제주에 내려오세요”라고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며느리가 벌어온 돈으로 생활하는 걸 아는데 눈치가 보여서 어떻게 내려가냐?” 내가 무능력하거나 일하기를 싫어해서 살림을 시작한 게 아니고,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서 시작한 일인데도 어머니는 늘 며느리 볼 낯이 없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공연히 살림을 시작했나’ 자책하면서 속으로 울음을 삼켜야 했다.
부모님이 늘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주를 떠나기엔 너무 정이 들어 버렸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 전화 말미에 “아버지 사랑해요” 했더니 수화기 너머에서 움찔하는 아버지가 느껴졌다. 젊을 때는 강하고 무뚝뚝한 남자도 나이가 들면서 힘이 빠지고 지치면 자식들의 그런 따뜻한 말 한마디가 절실할지도 모른다. 처음엔 “술 마셨냐? 무슨 일 있어?”라고 묻던 아버지도 한달이 넘도록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시더니 마침내 답하셨다. “그래, 나도 사랑한다.”
오성근(50) 한겨레주주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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