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방문한 경기도 안양시 안양동 동광전자 연구소장실은 다양한 개발 및 시험 장비로 가득했다. 강신원 연구소장은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연구소장도 납땜부터 소프트웨어 개발까지 다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신원 동광전자 연구소장
2013년 베트남에서 7년 만에 귀국한 강신원(61)씨는 은퇴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우리나이로 예순살. 30년 넘게 해왔던 전자회로 기술을 하루아침에 버리기가 아까웠다. 아내의 만류를 무릅쓰고 몇몇 헤드헌팅 회사에 취업을 의뢰했다. 대기업 개발실 과장, 다국적기업 연구소장, 한국연구재단 개도국과학기술지원단원(베트남 달랏·남딘대학교 파견) 등의 이력이라면 가능성도 없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헤드헌팅 회사들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실망하고 있을 때 전경련 중소기업협력센터 누리집(fkilsc.or.kr)에서 ‘재취업 지원’ 알림을 보게 되었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서 퇴직한 중견 전문인력에게 적합한 유망 중소기업을 알선해준다는 내용이었다. 별 기대 없이 신청했는데 얼마 뒤 ‘면접을 보라’는 연락이 왔다. 동광전자라는 방송기기 전문기업이었다. 연봉은 많지 않았지만, 다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막상 들어간 중소기업의 현실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자신을 제외한 연구원이 3명뿐이었다. 연구소장으로 있었던 다국적기업 연구소는 직원이 60~70명이었다.
“입사할 때는 회사에 대해 잘 몰랐고, 연구원이 이렇게 적을 줄도 몰랐습니다. 중소기업이라도 연구소장으로 했던 일을 계속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납땜부터 소프트웨어 개발까지 다 해야 하는 상황이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대기업 연구소장은 기획이나 연구원 관리 등 거시적인 업무가 대부분이다. 반면 강 소장은 기획 업무는 물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가리지 않고 연구·개발까지 다 맡고 있다. 회로 설계, 펌웨어 개발, 시험 등 젊은 기술자 3~4명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하고 있다.
“다행히 다국적기업 연구소장 시절 개인적인 관심으로 실무 공부를 계속했어요. 관리 업무만 했다면 여기에 적응하지 못했을 거고, 오래 못 견뎠을 것 같습니다.”
대기업·다국적기업 연구소장 거치며
30여년 연마한 전자회로 기술 아까워
예순에 중소기업 ‘재취업 지원’ 신청 막상 중소기업 현실은 예상 뛰어넘어
소장도 납땜부터 SW개발까지 다 해야 1만도 아닌 ‘수만시간 법칙’으로 돌파
생소한 방송기기 반년만에 개발 성공
“시니어가 기술력·성과 더 높아”
입사할 당시 동광전자는 학교, 건물 등에 들어가는 구내방송장치인 과부하 방지 고선명(HD)디지털방송기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었다. 동광전자 신정섭 전략기획팀장은 “강 소장님이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는 등 개발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협력업체와 조율까지 맡아주면서 6개월 만에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조달청 우수제품에 지정된 이 제품은 업계에서 1, 2위를 다투며 동광전자 매출의 60%를 차지하는 효자상품이 되었다.
“방송기기는 처음 접했는데, 몇 달 고생하니까 성과가 나오더군요. 수십년 동안 전자회로만 만졌으니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본 기술은 똑같거든요. ‘1만시간의 법칙’이란 말도 있듯이 엔지니어 수십년 하면 도가 틉니다.”
‘1만시간의 법칙’은 <아웃라이어>의 저자 맬컴 글래드웰이 제시했다. 한 분야에서 하루 3시간씩 10년, 1만시간을 투자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 소장은 한 분야에서 10년도 아니고 수십년을 일한 시니어 기술자의 가치를 강조했다.
“신입 연구원이 제 역할을 하려면 보통 3~4년이 걸립니다. 그런데 중소기업 이직률이 높아요. 특히 입사 3년 이내 이직률이 엄청납니다. 중소기업은 실적은 얻지도 못하고 투자만 날리는 거죠.”
투자비용도 높고, 높은 이직률의 위험부담까지 있는 신입 연구원보다 시니어 기술자가 중소기업의 대안일 수 있다. 시니어의 기술력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성과도 적을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강 소장은 “편견”이라고 반박했다.
“시니어가 오히려 빠릅니다. 연구·개발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적거든요. 다른 회사에서 이미 다 겪어봤으니까 성과의 질도 높습니다. 오랜 기간 다양한 과정을 경험했기 때문에 단가도 낮출 줄 알고, 영업·관리적 측면까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다른 회사에서 단순 지식도 아니고 지식이 몸에 밴 사람 자체를 사오는 겁니다.”
실제로 만 40살 이상 중장년 인력을 채용한 기업 10곳 중 7곳이 “경영성과에 도움이 되었다”고 답했다.(그래프 참조) 지난 2월 취업포털 파인드잡과 전경련 중소기업협력센터가 중소·중견기업 389곳에서 진행한 ‘중장년 채용 계획 및 채용 인식 실태조사’ 결과다. 중장년 인력이 가장 크게 기여한 분야는 ‘경험과 노하우 전수로 직원들의 업무역량 강화’였다.
“연봉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 나이 때는 알게 됩니다. 연봉의 20배는 매출을 올려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처음 입사해서는 회사에 교통비를 청구할 수가 없었어요. 아직 매출에 기여하지 못하는 나에게 교통비를 주려면 다른 부서에서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젊을 때는 그런 생각, 전혀 못했습니다.”
승진과 연봉에 대해 조급한 마음도 없어졌다. 그런데도 연봉은 입사할 때보다 150%나 올랐다. 강 소장은 “시니어는 초봉에 연연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중소기업이 시니어에 대해 확신을 못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일단 입사해서 증명을 하면 됩니다. 중소기업의 장점 중 하나가 성과가 나오면 처우가 무조건 좋아진다는 겁니다. 사람이 부족한 중소기업 입장에선 성과를 내는 사람은 무조건 잡을 수밖에 없거든요.”
물론 전제는 있다. 성과를 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관리 업무만 해오신 분이라면 중소기업 연구·개발 업무에는 잘 안 맞을 겁니다. 중소기업 이직을 생각하신다면 기술 실무를 계속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일당백이어야 합니다. 대기업 같으면 대리나 과장이 하던 일도 연구소장이 다 해야 해요. 그런 마음가짐과 각오 없이는 못 견딜 겁니다.”
강 소장은 평일엔 매일 밤 11~12시에 집에 들어간다. 아내가 미쳤다고 할 정도다. 연봉을 많이 줘서도 아니고, 승진을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쫓겨날까 봐 그런 것도 아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재미있어서 밤늦게까지 하게 되더군요. 지금도 기술 공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공부는 끝이 없는 것 같아요. 방송기기 분야에서 1년 반 정도 일했는데, 10년을 더 해서 방송 기술의 장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글·사진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30여년 연마한 전자회로 기술 아까워
예순에 중소기업 ‘재취업 지원’ 신청 막상 중소기업 현실은 예상 뛰어넘어
소장도 납땜부터 SW개발까지 다 해야 1만도 아닌 ‘수만시간 법칙’으로 돌파
생소한 방송기기 반년만에 개발 성공
“시니어가 기술력·성과 더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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