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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04 07:12 수정 : 2019.03.04 16:15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다 2007년 급성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당시 23)씨의 12주기 추모식이 지난 2일 고인의 유골이 뿌려진 강원도 속초 설악산 신선대에서 열렸다. 고인의 아버지 황상기씨(왼쪽 넷째), 태안발전소 하청노동자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왼쪽 셋째)를 비롯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회원 50여명이 참석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반올림 제공

오늘 14명 산재 신청 뒤 기자회견
반도체부문 아니라고, 시기 지났다고…
삼성 중재안으론 보상밖 피해자 수두룩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다 2007년 급성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당시 23)씨의 12주기 추모식이 지난 2일 고인의 유골이 뿌려진 강원도 속초 설악산 신선대에서 열렸다. 고인의 아버지 황상기씨(왼쪽 넷째), 태안발전소 하청노동자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왼쪽 셋째)를 비롯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회원 50여명이 참석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반올림 제공
<한겨레21>이 삼성전자-반올림 중재안이 나온 지난해 11월1일부터 지난달 13일까지 반올림에 들어온 신규 제보 220건을 분석한 결과 절반 이상이 중재안 보상 범위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3일 확인했다. 이들 중 14명은 4일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에 집단 산재 신청을 하고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집단 산재 신청은 본격적인 ‘반올림 시즌2’의 시작이다.

비영리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는 2007년 삼성전자 반도체노동자 황유미씨와 그 동료들이 백혈병으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결성됐다. 삼성전자에 산재 책임을 묻는 반올림의 싸움은 11년간 이어지다 지난해 11월1일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가 삼성전자와 반올림에 중재안을 전달하고 11월23일 양쪽이 협약식을 맺으며 마무리됐다.

하지만 중재안의 보상 범위는 질병 종류와 사업장, 진단 시기 등이 제한적이다. 삼성전자에서 일했더라도 호지킨림프종, 다발성신경병증, 뇌경색, 크론병, 식도암, 침샘암 등 발병자는 보상받지 못한다. 또 삼성전자의 반도체·엘시디(LCD) 외 사업부서, 삼성에스디아이(SDI)·삼성전기 등 계열사, 삼성전자 해외법인, 비사내상주 협력사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포함되지 않는다.

이번 반올림 신규 제보자 220명 중 삼성 관련 제보는 206명이었는데, 그중 62%에 이르는 127명이 중재안 보상 범위 바깥에 있었다.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병명 48명(38%), 사업장 35명(27%), 진단 시기 28명(22%), 기타 이유 16명(13%) 등이었다.

최성관(43)씨는 1998년부터 삼성전자 수원공장 시스템가전사업부에서 일했다. 에어컨 열교환기를 체임버에 넣고 불량이 있는지 검사했는데 체임버 내부가 더러워지면 시너(유기용매)로 닦았다. 시너에 발암물질이 있어 위험하다거나 몸에 나쁘니까 주의하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2003년 7월, 몸이 점점 피곤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침에 밥을 먹으면 속이 메슥거리면서 불쾌감이 생겼다. 진단 결과 급성림프구성백혈병이었다. 골수 이식을 받은 최씨는 2006년 회사를 그만둔 뒤로도 치료와 후유증 탓에 5년 동안 집에 누워 있어야 했고, 우울증이 찾아와 그 뒤로도 사회생활이 힘들었다.

산재 신청은 아예 생각도 못 했다. 작은형이 직장에서 일하다 손을 다쳤을 때도 산재를 인정받는 게 무척 어려웠는데, 과학적으로 업무 연관성을 증명하기 힘든 백혈병은 더군다나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포기했다. 그러다 2018년 11월 삼성전자-반올림 중재안이 발표됐다는 사실을 친척을 통해 알게 됐고 그때야 기사를 찾아봤다. 그동안 싸워온 피해자들이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월9일 반올림으로 전화했다. 하지만 보상은 삼성전자 반도체·엘시디 사업부에만 해당했다. 최씨가 일했던 가전부서는 중재안 보상 범위 바깥이다.

3일 <한겨레21>이 확인해봤더니 최씨처럼 중재안 발표 뒤 반올림으로 연락한 사람이 220명에 이른다. 2007년부터 11년간 반올림에 들어온 제보가 약 450건인데, 불과 석달 반 만에 그동안 들어온 양의 절반에 이르는 제보가 들어왔다. 그동안 삼성과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어차피 안 될 거라 생각해서, 또는 겁이 나서 연락하지 못한 이들이 희망과 기대, 용기를 가지고 반올림의 문을 두드렸다.

홍경화(53)씨도 그중 한 명인데, 중재안의 ‘진단 시기’ 제한에 걸려 보상을 못 받는다. 홍씨는 1988년 삼성전자 부천 반도체공장에 입사해 1992년 3월 퇴사했다. 퇴사 5년 2개월 뒤 전신성 홍반루푸스(이하 루푸스)를 진단받았고, 퇴사 26년 뒤 유방암에 걸렸다. 루푸스는 퇴사 뒤 5년 이내, 유방암은 퇴사 뒤 15년 이내까지만 보상 범위에 포함된다.

홍씨는 “퇴사 뒤 몸살과 고열이 자주 생겼는데, 동네 병원에 가면 감기라며 약을 처방해줬다”며 “당시는 국내에 루푸스라는 병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라고 말했다. 루푸스는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겨 몸에 만성적인 염증이 생기는 희귀난치병이다. 루푸스 발병부터 진단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마땅치 않다. 홍씨는 루푸스로 인해 손에 수시로 물집이 잡혔고 조금만 스쳐도 물집이 터져 상처가 생겨 사회생활을 제대로 못했다.

※클릭하면 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중재안에 한계가 있지만 11년 만에 어렵게 나온 중재안을 흔드는 것은 삼성과 반올림 모두에 큰 부담이다. 반올림의 공유정옥 활동가는 ‘반올림 시즌2’에서 보상 범위 바깥에 있는 피해자들의 산재 신청을 적극적으로 도울 계획이라고 했다. 궁극적으로는 “정부가 산재 인정의 문턱을 낮추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올림 시즌1’의 활동이 삼성의 책임을 묻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면, ‘반올림 시즌2’에서는 입법 활동 등으로 다변화될 것으로 보인다. 황상기 반올림 대표는 <한겨레21> 인터뷰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이 사망하는 기업을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 무서워서 예방 대책을 세울 것”이라고 했다. 이종란 반올림 활동가는 “반도체 노동자 직업병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선 공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 등을 알아야 하는데 여전히 영업비밀로 묶여 있다”며 ‘반올림 시즌1’에서 해왔던 알 권리 투쟁도 계속될 것임을 시사했다.

삼성에선 최근까지도 직업병으로 의심되는 사망자가 나오고 있다. 지난 1월29일 삼성에스디아이 수원사업장 클린룸에서 일하던 황아무개(32)씨가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사망했다. 황씨는 2014년 5월부터 삼성에스디아이에서 삼성전자의 반도체 포토·식각 공정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을 개발하다 2017년 12월 병을 얻었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황씨가 직접 쓴 재해경위서에는 “코팅 시에는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화학물질 탓에) 코를 찌르는 냄새가 엄청났으며, 화학물질이 테이블 외부에 쌓여 청소 시에 애를 먹곤 했다”고 적혀 있는 등 직업병으로 의심할 만한 대목이 있다. 하지만 황씨는 삼성에스디아이 근무자라 중재안 보상 범위에 포함되지 않으며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신청을 한 지 10개월이 넘도록 역학조사 실시 여부조차 알려오지 않았다.

<한겨레21>은 삼성에스디아이에 황씨 등 전·현직 직원의 질병에 대한 보상안을 고민하고 있는지 물었으나 “사실관계를 파악 중”이라는 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 다른 답변은 거부했다. 삼성전자 관계자 역시 “그룹 개념이 사라진 뒤 계열사별로 독립 경영을 하고 있어 다른 회사의 보상안에 대해 말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중재안에 포함된 보상 범위 확대에 대해서도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기구인) ‘삼성전자 반도체·엘시디 산업보건 지원보상위원회’에 전권을 위임했으며 추가 보상이 필요하다면 보상위원회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변지민 <한겨레21> 기자 dr@hani.co.kr, 이재호 <한겨레21> 기자 ph@hani.co.kr

*더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21> 1252호(창간 25돌 기념 특대 1호) 표지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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