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인혁당 피해자 이창복씨의 45년 고통
박정희 정권이 고문 조작한 인혁당
8명 사법살인되고 15명은 옥살이
민주화 후 재심무죄로 배상금 받아
이명박·박근혜때 “절반 내놔” 요구
받은 금액보다 더 많은 빚 쌓여
가해자가 피해자 두번 죽이는 꼴
“국가 대표 대통령 주도로 풀어야”
인권위 권고에도 청와대는 난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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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 비웠어요. 다만, 여생을 걱정 없이 살도록 해줬으면 좋겠어요.” 인혁당 조작사건 피해자 이창복씨가 지난 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자택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마친 뒤 부인 박인순씨와 함께 현관 앞에 섰다. 양평/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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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9일은 박정희 정권에 의한 ‘인혁당 사법 살인’ 44주년이다. 1차 및 2차 인혁당 사건이 모두 조작된 것으로 진실은 어느 정도 밝혀졌으나, 관련 피해자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법원이 배상금을 대폭 삭감하고, 가해자인 국가가 채권자 행세를 하면서 이들을 여전히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저한테 마음 수양을 시키는 것 같아요. 지난 2년간 뒷산으로 산책하러 갈 때마다 집사람 손을 꼭 잡고는 말하지요. ‘여보, 우리 탐심을 버립시다. 마음을 비워야만 우리가 살 수 있어요. 설령 우리집을 빼앗기더라도 미워하지 맙시다’고 말이죠. 지금도 그런 마음입니다.”
지난 3일 오전 경기도 양평 자택에서 만난 이창복(81)의 낯빛은 온화하고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는 현재 고통스럽고 치욕스런 상황에 부닥쳐 있다. 그는 2년 전인 2017년 2월 경기도 양평 자택에 대한 강제 경매 통보를 받았다. ‘부당 이득’을 환수해 가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일단 유보 상태에 있긴 하지만, 언제든 경매가 다시 진행돼 낙찰되면 거리로 쫓겨나야 할 판이다.
“참, 어이가 없는 일이죠. 지난 45년간 국가한테 일방적으로 당한 셈이죠. 과거 죄 없는 저를 감옥에 가둔 것도 국가이고, 그 잘못된 행위에 대해 배상금을 줬다가 도로 뺏는 것도 국가예요.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저를 범법자 취급하고 있어요. 허허.”
고리대금처럼 연 20%씩 늘어나는 빚
이창복은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1974년에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2차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다. 재심(2008년)에서 무죄를 받은 뒤 다른 피해 생존자 및 유가족(모두 77명)과 함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1·2심 법원(2009년)은 이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인정해 배상금 지급을 결정하고, 판례대로 배상금의 65%를 우선 가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창복과 그의 자녀들은 이에 따라 10억9천만원을 받았다. 1974년 5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2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뒤 1982년 가석방될 때까지 8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빨갱이 가족’이란 누명을 뒤집어쓴 채 살아온 30여년의 아픈 세월에 대한 최소한의 위로이자 국가가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사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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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조작사건 피해자 이창복씨는 지난 3일 경기도 양평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면 촛불정부가 우리 문제를 과감하게 결단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양평/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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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권이 바뀌자 국가는 이내 안면을 바꿨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1월 대법원 3부(주심 박시환 대법관)은 1심, 2심의 배상 판결을 뒤집었다. 피해자들에게 주는 위자료(배상금)를 늦게 주는 데 대한 지연손해금(이자)이 발생하는 기점을 바꾼 것이다. 그동안의 판례는 국가가 불법을 저지른 때부터 배상 판결이 이뤄진 때까지 연 5%의 이자를 계산하도록 했다. 그런데 대법원은 “(불법행위 발생 시점으로부터) 장시간이 경과해 현저한 과잉 배상의 문제가 제기된다”며 지연손해금 발생 시점을 사건 발생(형 확정이 끝난 1975년 4월9일)이 아니라 해당 손해배상 소송의 변론 종결일(2009년 11월13일)로 바꿨다. 무려 34년의 이자를 깎아버린 것이다. 이후 대법원은 과거사와 관련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줄줄이 같은 판결을 내렸다. 이로 인해 인혁당 재건위 피해 생존자와 유가족 77명은 2년 전에 받은 490억원 중 절반에 가까운 액수인 211억원을 도로 내놓아야 했다.
이창복은 다른 피해자나 유가족과 마찬가지로 2009년에 돈을 받은 뒤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주변에 신세 졌던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나눠줬다. 2011년에 입주한 양평 집을 짓는 데도 사용했다. 돈을 다 쓰고 난 뒤여서 대법원의 납득 못 할 판결을 따르려고 해도 돌려줄 돈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꿈과 청춘을 앗아간 국가는 잔인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2013년 7월 국가정보원은 인혁당 재건위 관련 생존자와 가족 77명을 상대로 부당이득 반환 청구 소송을 냈다. 30여년 전 고문으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했던 당사자가 피해자들을 또다시 옥죄고 나선 것이다. 이번에도 법원은 국가의 손을 들어줬다. 더구나 34년 동안의 지연손해금을 빼앗긴 피해자들은 이때부터는 연 20%라는 높은 연체 이자율을 물어야 했다. 이 때문에 4억9천만원이던 이창복의 반환금이 현재는 무려 11억원이 넘는다. 처음 배상받았던 돈을 넘어섰고, 지금도 매일 30만원에 가까운 빚이 늘어나고 있다. 국가는 법원 판결을 내세워 이창복의 유일한 남은 재산인 시골집 한 채까지 빼앗으려 하고 있다.
양평 시골 마을에 자리 잡은 주택은 이창복에게는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구난처이다. 그는 고문과 징역살이로 심한 대인공포증과 우울증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출옥 뒤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을 차려 살아갔지만, 이 일마저 접어야 했다. 아이에 대해 학부모들과 면담할 때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는 등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학원 일을 그만두고 1990년대 중반 서울을 떠나 농촌인 양평에 내려와 살면서 차츰 치유됐다.
인혁당 관련 11명이나 고통 중
김대중 정부 시절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노무현 정부의 진실과화해위원회 진상조사 결과 1차 인혁당(1964년)과 2차 인혁당 사건(1974년)은 둘 다 당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용공으로 몰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1차 사건은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대한 대학생들의 반대 시위가 거셀 때 터졌다. 북한의 지령을 받는 대규모 지하조직이라고 중앙정보부가 발표했으나, 이를 넘겨받아 수사한 서울지검 공안부(부장 이용훈) 검사들이 근거가 없다면서 기소장에 도장찍기를 거부하고 항의 사표를 낼 정도로 엉터리였다. 1974년 봄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를 시도하던 대학생들을 탄압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는 또다시 이들의 배후조직으로 인혁당 재건위라는 실체 없는 조직사건을 만들어냈다. 유신정권은 1차 사건 때와 달리 2차 사건 때는 이미 사법부도 장악한 상태였다. 관련자 23명은 비상군법회의(1·2심)-대법원의 비정상적인 사법절차를 거쳐 8명(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재완, 도예종)은 사형, 나머지 15명에 대해서는 무기에서 징역 20~15년 형을 선고받았다. 8명에 대한 사형이 이튿날 새벽 기습적으로 집행됐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법학자회는 4월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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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9일 아침 체포된 뒤 1년 만에 처음으로 면회를 기대하며 서대문구치소를 찾았던 인혁당 재건위 피해자 가족들이 그날 새벽 이미 8명의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오열하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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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복이 1974년에 자신이 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그 고통을 받아야 했는지 돌이켜 생각해봐도 납득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철학 석사학위를 마친 그는 칸트 철학의 세계적 학자가 있는 일본 도쿄대로 박사과정 유학을 준비하면서 당시 국민대와 명지대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가난한 고학생 신분이었던 그는 대학 시절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1947년 14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다른 두 형제와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지만, 6.25 전쟁 때 부친의 사망으로 졸지에 고아가 됐다. 두부 공장 맷돌 돌리기 등 온갖 노동을 하면서도 검정고시를 거쳐 1958년 대학(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4·19가 나던 해에도 학비를 벌기 위해 휴학을 하고 종로의 한 학원에서 영어와 독일어 강사를 하고 있었죠. 같은 과 친구들이 스크럼을 짜고 학원 앞까지 진출한 것을 보고 그들을 따라 세종로 동아일보사 앞까지 시위에 한 번 참여해본 적이 있어요. 시위는 그게 다였죠.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마음이야 다른 학생들과 같았지만, 저로서는 먹고살기 바빠 시위에 참여할 시간조차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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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복씨가 지난 3일 양평 자택의 서재 책장 앞에 서 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 일어 등 외국어를 대부분 혼자 익힌 이씨는 요즘도 원서를 주로 읽고 있다. 양평/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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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을 때 이창복은 젖먹이부터 4살 난 아이 셋을 둔 가장이었다. 인혁당(인민혁명당)이라는 조직 자체가 애초에 없었으니 인혁당 재건위도 당연히 있을 리 없으며, 이창복이 그 조직원일 까닭도 없었다. 그가 참여했던 단체는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된 공개단체인 민주수호국민협의회(1971년 창립. 공동대표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가 전부였다.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민주수호국민협의회 행사에 가끔 참석해 민주화운동에 힘을 보탠 정도였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던 김용원과 대학 때부터 친구였고, 일본 유학을 위해 삼락일본어학원에 다니면서 알게 된 김종대, 이수병 등과 가끔 어울린 것을 꼬투리 삼았던 것이다.
인혁당 관련 피해자와 유가족 77명 가운데 현재 국가에 의해 부동산 등이 압류된 사람은 이창복을 포함해 모두 11명이다. 강창덕, 전창일 등은 예금통장을 가압류당한 상태이며, 이창복과 전영순(전재권의 딸) 등 6명은 아파트 등 부동산을 압류당했다.
국가인권위(위원장 최영애)는 지난 3월 이와 관련해 “국가폭력과 형사사법 절차의 남용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고통이 △최초 국가폭력에 의한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 박탈에서 시작해 △경제적 불이익과 사회적 멸시로 인한 차별 등을 거쳐 △진실이 규명된 현재에도 경제적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그 형태를 달리하여 계속되고 있다”며 “인혁당 재건위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는 사법부 판단과 별개로, 행정부 수반이자 국가 책임의 정점인 대통령이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국가가 국민에게 저지른 폭력으로 인한 문제이니만큼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도 국회도 법원도 다 미적미적
해법이 있을까. 일차적으로는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 국가가 인혁당 피해자들에 대한 정의롭지 못한 채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인혁당 재심 무죄를 끌어냈던 김형태 변호사는 “대통령한테는 사면권도 있는데 정책적 고려를 통해 억울한 채무자에 대한 채권을 국가가 포기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다고 본다”며 “이는 법적인 배임 문제를 넘어서는 행위이기에 위법성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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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인 2017년 2월24일 서울 여의도 IFC몰에 있는 한 영화관에서 영화 <재심> 을 관람하기에 앞서 김태윤 감독,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 피해자, 인혁당 사건 관련자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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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청와대는 난색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어떻게 해서든 이 문제를 해결하고픈 마음은 있다”면서도 “국가채권관리법에 국내 채권을 포기할 수 있는 규정이 없기에 대통령이 나서기에는 법적으로 곤란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대신 청와대는 채권관리법을 개정해 국내 채권 포기에 대한 규정을 신설하거나 인혁당 관계자 구제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안 등을 선호하는 분위기이다. 이 경우 자유한국당 등 보수 야당의 반대를 뚫어야 한다.
대법원이 문제 있는 판례 변경(2011년)을 다시 바로잡을 수도 있다. 원래 판례를 변경하려면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판결해야 하지만, 당시 대법원은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에서 결론을 내렸다. 명백한 잘못이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4·9통일평화재단(인혁당 피해자들이 만든 단체) 쪽은 유사한 과거사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구체적 방법이 뭔지는 모르지만, 촛불로 출범한 정부이니만큼 국가에 의해 두 번 죽임을 당하고 있는 우리 문제를 하루빨리 풀어줘야 하지 않겠어요. 역사에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면 정부가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으면 좋겠어요. 우리 두 노인이 여생이나마 걱정 없이 이 집에서 보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빨갱이 집안’이라는 멸시 속에서도 홀로 자녀 3명을 훌륭하게 키운 부인(박인순·83)의 어깨를 감싸며 이창복이 말했다.
“저는 우리 선생님(남편)을 늘 존경합니다. 항상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고,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고민하세요. 요즘도 하루라도 책을 읽지 못하면 헛되게 보냈다고 안타까워하죠. 이런 분을 국가가 그만 괴롭혔으면 좋겠어요.” 박인순도 따뜻한 미소로 답했다.
양평/김종철 선임기자, 성연철 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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