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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13 05:00 수정 : 2019.05.13 08:04

딴저테이의 아버지 깜칫이 지난 4월26일 미얀마 이라와디의 자택에서 불단에 촛불을 밝히며 아들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대恨민국 세계사 ㅣ 이주노동자 딴저테이의 죽음 그후

지난해 8월 출입국 단속 과정에서
추락사한 미얀마 노동자 딴저테이
그의 죽음 둘러싼 진실 공방 끝에
인권위 직권조사로 밝혀진 사실들

안전 확보 방안 규정 안 지키고
추락 직후 구조 않고 단속 계속
법무부 “적법” 주장 사실과 달라
책임자 징계 등 장관에게 권고

미얀마 가난한 마을 딴저테이 집
아버지, 매일 아들 극락왕생 기원
가족 생계 짊어진 아들 죽음으로
“팔이 빠진 듯” 부러진 가족의 삶

체류 기한을 어긴 이주노동자는
단속을 피하다 추락 사망했으나
적법 절차를 지키지 않은 국가는
아무런 법·행정적 책임지지 않아

유족은 한국 정부에 국가배상소송
법무부는 인권위 권고에 응답 없어

아버지가 아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허리를 꺾고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아들은 엎드린 아버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영정사진 안에 갇힌 아들은 표정이 없었다. 아버지 깜칫(53)은 매일 불단에 촛불을 밝히며 아들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아들의 죽음이 계속되고 있었다. 책임지는 자 없는 그의 죽음이 ‘돌아오지 못한 집’에서 230일째(지난 4월26일) 연장되고 있었다.

아들의 추락사

사망 17일 전 지난해 8월22일 깜칫은 물고기 잡는 그물을 손질 중이었다. 오후 2시30분께 같은 마을에 사는 조카 떼푸아웅(18)이 달려왔다. 조카가 휴대전화를 보여주며 페이스북에서 읽은 소식을 전했다. 한국에 일하러 간 아들 딴저테이(26)가 응급실에 있다며 주한 미얀마대사관이 가족을 찾고 있었다. 아들이 구급차로 실려 간 까닭을 알 수 없었던 어머니 산싼윈(52)은 점을 치며 아들의 무사를 빌었다. 저녁이 돼서야 한국에 있는 아들의 동료(미얀마인 유웅툰·가명·30)와 전화로 연결됐다. 아들이 출입국·외국인청의 단속을 피하다 추락해 의식불명이라고 했다. 산싼윈이 전화기를 떨어뜨리고 기절했다.

사망 일주일 전 깜칫이 뇌사 상태인 아들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비자(한국인은 무비자로 미얀마에 입국할 수 있지만 미얀마인의 한국 입국은 비자가 있어야 가능)를 받느라 아들을 만나기까지 열흘가량 걸렸다. 비행기표 값은 원금의 15%를 이자로 약속하고 빌렸다. 이름을 불렀지만 4년여 만에 본 아들은 눈을 감은 채 답하지 않았다.

사망 당일 9월8일 아침 8시15분 딴저테이가 숨을 멈췄다. 병원 사망진단서는 사인을 ‘외상성 뇌출혈’이라고 썼다. 사망의 종류는 ‘외인사’였고 의도성 여부는 ‘미상’으로 기록됐다. 깜칫은 아들의 장기를 한국인 4명에게 기증했고 주검은 화장해 인천가족공원에 뿌렸다.

사망 17일 전 “닭고기 많이 먹자.”

경기도 김포시 구래동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딴저테이가 점심 배식을 기다리며 말했다. 아파트 지하 기초 놓는 일을 하느라 그와 동료들은 지쳤고 배가 고팠다.

“이거 마무리하면.”

딴저테이와 헤인(가명·28)은 ‘지금 하고 있는 공사만 끝내고 귀국하자’는 대화를 이날만 세번째 나눴다. 딴저테이와 헤인과 유웅툰은 주거비를 아끼려 한집에서 살았다. 유웅툰은 10여명으로 구성된 이주노동자 철근팀의 팀장이었고, 딴저테이와 헤인은 그의 팀원이었다. 그들이 마주 앉아 좋아하는 닭고기를 먹으려던 순간이었다.

낮 12시5분 인천출입국·외국인청과 서울남부출입국·외국인사무소 단속반이 식당으로 들이닥쳤다. 단속반은 공사 현장 관계자에게 사전 협조와 동의(규정상 필수 절차)를 구하지 않았다.

“도망가.”

딴저테이가 외치며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가 통과한 직후 창문이 차단당하자 헤인은 출입문으로 빠져나와 몸을 숨겼다. 유웅툰은 식당(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임시구조물) 옆 창고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야 ××놈들” “앉아 인마, 죽으려고”….

단속반의 욕설이 터졌다. 단속반원들은 등록·미등록과 국적을 따지지 않고 수갑을 채웠다. 체포부터 한 뒤 신분 확인은 나중에 했다. 단속반은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았고 체포 취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창고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유웅툰은 밖에서 구급차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두 시간 뒤 창고에서 나왔을 때 그는 딴저테이가 추락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식당 밖으로 도망쳤던 헤인은 “네 친구 떨어졌다”는 말을 현장소장한테 들었다.

낮 12시7분 딴저테이가 창밖 7.5m 아래로 추락했다.

그보다 먼저 한 명이 창문을 지나 1m 건너편의 지하주차장 흙막이 구역 공사장으로 넘어갔다. 딴저테이가 뒤이어 창틀에 다리를 올렸다. 창문 밖을 지키던 단속반원이 손으로 그의 무릎을 제지하는 장면이 단속반의 바디캠 영상에 찍혔다. 손을 밀치고 창문에서 뛰어내린 딴저테이는 공사장 비계에 내려앉는 듯하다 영상에서 사라졌다. 그는 콘크리트 바닥에서 발견됐다.

추락을 확인한 뒤에도 단속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119에 신고전화만 하고 구조엔 나서지 않았다. 사고 지점에 가장 먼저 도착해 그의 상태를 확인한 사람도 공사현장 소장이었다. 12시15분에 도착한 구급대원들은 단속반원들이 아닌 공사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를 구조했다. 12시58분 구급차가 병원으로 출발했다. 출동한 경찰에게 단속반은 “정상적으로 단속하던 중 사고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공사현장 관계자가 항의하며 언쟁이 벌어졌다.

“안전 확보도 안 하고 막무가내로 들어와서 팔을 잡아채면 어떡하나.”

단속은 공사장 주변에서 오후 5시께까지 이어졌다.

사망 뒤 ‘살인단속 규탄 및 미얀마 노동자 딴저테이씨 사망사건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청와대 앞으로 오체투지를 하며 죽음의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창문을 넘던 딴저테이가 단속반에 다리를 붙잡혀 균형을 잃고 추락했다고 목격자들과 대책위는 주장했다. 미얀마 현지 언론들(<세븐데이 데일리 뉴스> 등)도 딴저테이 사망과 진상규명 요구를 자국인들에게 전했다.

미얀마 양곤에서 차로 1시간30여분 걸리는 곳에서 이라와디강의 지류인 빨라잉강이 흘렀다. 딴저테이의 집은 강 건너 포콘수마을에 있었다. 포콘수마을에서 쌀을 실어온 배들이 강가에 닿았다.
어깨에 얹힌 생활고

사망 41일째 딴저테이 죽음을 보도하는 한국 언론에 법무부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며 입장(2018년 10월1일)을 냈다. “단속 과정에서 욕설을 한 사실이 없”고, “단속 사실을 고지”했으며, “신원을 확인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단속한 사실도 없다”며 적법성을 강조했다. 사실과 다르다는 법무부의 해명은 사실과 달랐다.

사망 148일째 사건을 직권조사한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결과를 확정(2019년 1월16일)했다. 법무부와 출입국·외국인청의 “적법 단속” 주장이 실제와 다름을 밝혀냈다. “딴저테이와 단속반원 사이의 신체 접촉이 추락의 직접 원인이라고는 단정할 수는 없으나 안전 확보 방안을 마련토록 한 규정을 단속반이 지키지 않았다”고 인권위는 판단했다. 단속반은 주거권자의 단속 동의 절차를 밟지 않았고, 단속에 욕설과 과도한 강제력을 사용했으며, 장기간 수갑을 채웠다. “추락 직후 구조행위를 하지 않고 단속을 계속해 인도적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딴저테이의 사망에 “국가의 책임이 있다”며 법무부 장관에게 책임자 징계를 권고했다. 대한변호사협회 법률구조재단 이사장에겐 고인과 유가족의 권리 구제를 요청했다.

사망 230일째 인권위의 권고에도 법무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국에서 딴저테이의 죽음이 시간에 묻히며 증발하고 있던 지난달 26일, 건기의 미얀마는 섭씨 42도까지 달아올랐다.

양곤을 빠져나온 자동차가 무허가 움막집들이 줄지어 선 시골길을 달려 이라와디(미얀마 남서부)로 넘어갔다. 이라와디는 미얀마의 가장 중요한 물길인 이라와디강의 삼각주에 있었다. 양곤에서 차로 1시간30여분 걸리는 곳에서 이라와디강의 지류인 빨라잉강이 흘렀다. 딴저테이의 집은 강 건너 포콘수마을에 있었다. 강물이 퇴적한 ‘지독히도 고운 흙’ 위에 삶을 부린 마을이었다.

“한국에서 일할 때 보낸 사진이에요.”

기타를 치며 웃고 있는 아들을 보며 아버지 깜칫이 말했다. 죽은 뒤 확대해 벽에 건 사진에서 입자가 깨진 아들의 얼굴이 흐릿했다. 그 흐린 아들의 웃음 위에 가족의 생활이 얹혀 있었다. 딴저테이의 어린 동생 마닌제디아웅(6)이 언제 봤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빠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포콘수마을엔 300여가구가 살았다. 대부분 쌀농사를 지었고 대부분 가난했다. 오랜 군부독재를 거치며 미얀마의 정치와 생활은 궁핍해졌다.

“일자리가 충분치 않고 일자리가 있어도 돈벌이가 안 되니까.”

어머니 산싼윈이 딸의 뺨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미얀마 청년들은 이주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했다. 딴저테이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한국으로 갔다. 딴저테이의 형은 정신장애를 앓았고 일을 구할 형편이 못 됐다. 아버지의 쌀농사로는 하루하루 꾸리기에도 고달팠다. 딴저테이는 한국에서 번 돈 대부분(한달에 150여만원)을 집으로 보냈다. 한국에서 일하는 비슷한 처지의 ‘딴저테이들’이 포콘수마을엔 서너명 더 있었다.

“형, 냄새가 심해서 머리가 너무 아파요. 공장장도 괴롭히고. 직장을 옮기고 싶어요.”

2017년 어느 날 한국의 소모뚜(한국 거주 미얀마 출신 인권운동가·2011년 난민 인정)는 딴저테이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딴저테이는 2013년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취업했다. 그가 첫 직장인 플라스틱 원료 생산 공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소모뚜가 답 문자를 보냈다.

“심각한 병이 아니면 직장 변경(고용허가제는 고용주 동의 없인 사업장 이동 불가) 못해. 제도가 그래.”

그해 말 소모뚜에게 다시 문자가 왔다.

“월급도 적고 머리 자주 아파요. 공장장 안 좋은 사람이에요. 미얀마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사장님이 안 된대요. 체류기간이 두 달 남았는데 지금 출국하면 퇴직금 받을 수 있어요?”

귀국을 고민하던 딴저테이는 그 회사에서 체류기간 4년10개월을 다 채웠다. 2018년 3월 미등록이 된 그는 한국에 남아 강원도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제주도에서 건너온 유웅툰을 공사장에서 알게 돼 그의 팀원이 됐다. 약속된 급여를 받지 못한 두 사람은 몇 달 뒤 추락 사고가 예정된 김포로 옮겼다. 헤인도 김포에서 만났다. 딴저테이가 미등록 체류를 택한 이유를 유웅툰과 헤인에게 이야기했다.

“결혼할 사람이 생겼어.”

4년10개월 동안 번 돈 대부분을 고향집에 보낸 딴저테이에겐 모아둔 돈이 없었다. “부모님에게 그 돈을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는 “결혼 자금만 벌어서 가겠다”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딴저테이는 미등록으로 1년만 더 일할 생각이었다. 아들의 죽음 뒤 산싼윈은 억지로라도 귀국시키지 않은 자신을 책망했다.

그해 9월 소모뚜는 한 미얀마 청년의 추락사 소식을 들었다. 자신에게 귀국 방법을 묻던 딴저테이란 사실을 그는 알게 됐다. 소모뚜는 딴저테이 사망 진상규명 집회마다 참여했다. 유웅툰과 헤인의 말을 통역하며 그들의 목격 사실들을 전했다.

딴저테이의 어머니 산싼윈이 한국에서 보내온 아들의 옷들을 꺼내 보고 있다.
“그냥 잊히길 바라나”

사망 233일째 “현재 법무부 태도를 보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히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닌가.”

그의 죽음을 계기로 열린 토론회(4월29일 ‘미등록 이주민 단속 실태 파악과 대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서 대책위 활동가 랑희는 우려했다.

체류 기한을 지키지 않은 이주노동자는 단속을 피하다 사망했으나, 적법 절차를 지키지 않은 국가 행정은 그의 사망 뒤에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는 ‘불법체류자’의 죽음 뒤엔 단속 실적이 쌓이며 흘린 ‘불행한 통계’만 남았다. 2008년부터 2018년 7월까지 10년간 단속 과정에서 미등록 체류자 9명이 사망하고 77명이 다쳤다고 법무부는 집계했다. 한달 뒤 딴저테이의 죽음이 통계에 더해졌다. 사망 원인 대부분은 추락이었다.

딴저테이의 죽음 뒤에도 단속 중 부상자는 이어졌다. 대책위가 법무부의 사과와 인권위 권고 이행을 요구하며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지난 2월26일)을 열기 하루 전에도 경남 김해에서 베트남 이주노동자가 의식불명(단속을 피하다 바닥에 얼굴이 부딪힌 뒤 구토와 발작·깨어난 뒤 강제출국)에 빠졌다. 법무부는 거꾸로 인원을 늘리며 범정부 합동단속을 강화했다.

사망 직후 유웅툰과 헤인은 김포를 떠났다. “무서워서 더는 그 도시에 머물 수 없었”다. 헤인은 친구의 죽음과 그가 죽음에 이른 단속 방식에 “쇼크”를 받았다. “미등록 잡는 게 출입국의 임무겠지만 그렇게 잡는 건 너무 충격적”이었다.

한국인의 일상은 이미 그들이 없으면 유지되지 않는 단계에 와 있다. 그들이 밭·축사·바다에서 일하지 않으면 한국인의 신토불이 밥상은 차려지지 않고, 그들이 공장에서 일하지 않으면 한국인의 편리도 영위되지 않는다. 그들은 한국인이 하지 않는 일을 하고 한국인이 받을 수 없는 돈을 받으며 한국인의 일상을 지탱하고 있다. 유웅툰은 말했다.

“우리는 한국인의 일자리를 뺏는 게 아니에요. 한국의 밑바닥에서 한국인들이 견디지 못하는 일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 깜칫과 어머니 산싼윈이 아들 딴저테이의 영정을 들고 집 앞에 섰다. 판잣집을 허문 자리에 아들이 한국에서 벌어 보낸 돈으로 조금씩 새 집을 지었다. 아들의 죽음으로 돈이 끊기자 철근 뼈대를 드러낸 채 2층 공사가 중단됐다.
부러진 삶

사망 230일째 깜칫은 포콘수마을에서 태어나 마을을 떠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대를 이어 살며 딴저테이를 낳았다. 옛집을 허문 자리에 딴저테이가 한국에서 벌어 보낸 돈으로 조금씩 새집을 지었다. 나무로 잇고 덧댄 판잣집들뿐인 마을에서 그의 집만 시멘트를 바르고 페인트를 칠했다. 딴저테이가 죽은 뒤 2층 공사가 철근 뼈대를 드러낸 채 중단됐다.

“물고기 관리 잘하세요.”

추락 사흘 전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딴저테이는 말했다. 그는 고생만 할 뿐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는 농사 대신 양식장을 하도록 아버지에게 권했다. 아들이 부친 돈으로 시작한 양식장은 양식장이라기보다 ‘물을 채워 물고기를 가둔 진흙 논’이었다. 그곳에서 딴저테이 가족뿐 아니라 친척들 모두가 생계를 꾸렸고 그가 죽자 그의 노동에 의지해온 가난한 삶들도 부러졌다. 돈이 끊긴 가족은 다 자라지 않은 물고기를 잡아 헐값에 넘기고 있었다.

딴저테이 사망 하루 전 한국에서 경찰이 묻고 깜칫이 답했다.

“알고 있는 사고 경위 외에 다른 의심되는 부분이 있나요?”

“없습니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지난 1월2일 서울 광화문광장 분향소를 찾아온 깜칫씨를 위로하고 있다. 사진 딴저테이 대책위 제공
죽음에 직면한 아들을 보며 사건의 진실과 책임을 따질 정신이 없었던 깜칫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상황을 이해하게 됐다.

“풀리지 않는 의문보다 슬픔이 커요.”

딴저테이는 새집과 양식장을 한번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깜칫은 한국 변호인의 도움을 받아 한국 정부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6월12일 2차 심리 예정)과 행정소송(2차례 산재 불승인 관련)을 진행 중이다.

깜칫이 불단 앞에서 손을 모았다.

“단속되더라도 단속 때문에 죽는 일은 다시 없길 바랍니다.”

딴저테이 사망을 두고 인권위의 권고를 받은 법무부는 이행 계획을 90일 안(사망 247일째인 5월13일까지)에 제출해야 한다. 법무부는 “자체 검토를 마친 후 서면으로 인권위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한겨레>에 밝혔다.

※참고 자료: 국가인권위 딴저테이 사건 직권조사 결정문, 추락 당시 119 신고 내역·녹취록·구급일지, 병원 사망진단서, 경찰의 내사결과 보고서·변사사건 처리결과·검찰지휘건의서·검시필증·유족과 참고인 경찰진술조서.

이라와디(미얀마)/글·사진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불법체류자 쫓아내면 고용창출”된다는 법무부의 단속논리

일자리 둘러싼 한국인-외국인
갈등 구도로 단속 정당성 주장

정부는 합동 단속 강화 이유로 미등록 체류자 급증을 들고 있다.

2019년 3월 현재 미등록 체류자는 35만6095명(전체 체류자 237만9805명의 14.9%)이다. 최근 급증 배경엔 지난해 평창겨울올림픽 성공과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정부의 무사증 확대가 크게 작용했다. 2017년 12월 말(25만1041명)부터 2018년 5월 말(31만2346명) 사이 증가한 미등록 체류자 6만1305명 중 5만2213명이 무사증 입국자였다.

정부가 “미등록을 양산하는 제도와 정책은 그냥 두고 필요할 때마다 단속으로 숫자 관리에만 치중”(석원정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운영위원)한다는 지적이 인다. 이주노동자 취업의 근거인 고용허가제도 미등록 양산의 원인이 되고 있다.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폭언·폭행을 당하고 근로조건이 열악해도 사업장을 이탈하면 미등록이 된다. 고용주가 사업장 이동에 동의해도 3개월 안에 새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미등록이 되고, 마흔살 이상의 노동자(고용허가제는 18살 이상 40살 이하만 허용)가 한국에서 일하려면 미등록이 될 수밖에 없다.”(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 2000년부터 2017년까지 단속으로 강제퇴거된 사람만 34만800여명이었다.

“법무부, 40~50대 가장의 마지막 피난처 건설현장 강력 단속.”

딴저테이 사망 12일 뒤(2018년 9월20일) 법무부는 “불법체류 외국인이 건설업 등에서 국민 일자리를 잠식하는 것을 막겠다”며 특별 단속 대책을 발표했다. “불법체류 취업자들이 차지한 국민의 일자리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고용창출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는 설명이 따랐다. 전년 동기 대비 3천명 증가에 그치면서 취업자 수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뉴스(지난해 8월)가 떠들썩하게 보도된 지 한달 만이었다. 법무부는 일자리를 둘러싼 한국인과 외국인의 갈등 구도로 단속의 정당성을 풀어냈다. 취업난을 이용한 새로운 단속 논리의 등장이었다.

이주노동자가 건설시장의 선호 노동력이 된 배경엔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있었다. 원청은 공사기간 단축과 사업비 축소로 하청업체를 압박했다. 하청업체는 싼값에 부리되 산업재해나 임금체불에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해 비용을 줄였다. 한국은 이제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감내하는 이주노동자들 없이는 건물이 올라가지 않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다단계 하도급이 부른 건설노동시장의 왜곡을 외면하고 이주노동자에게 고용난의 책임을 돌리려 한다는 비판이 법무부를 향했다.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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