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거리를 걸으면 길을 잃을까봐 두려운 게 아니라, 새롭게 만날 모든 것이 설레어 두근거리는 성격이라면 꼭 도전해보고 싶을 직업이 있다. 모두에게 꼭 맞는 여행을 만들어내 여행의 기쁨을 알려주기 위해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낸 사람, 고재열 여행감독을 만났다.
Q. ‘여행감독’이라는 직업이 생소해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요?
많은 사람이 여행작가와 여행 가이드라는 직업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여행작가는 여행지의 감동을 글과 사진으로 표현하고, 여행 가이드는 실제 여행지에서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죠. 여행감독은 그 둘 사이를 잇는 직업입니다. 여행지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동을 실제 여행지에서 직접 느끼도록 옮겨주는 거예요.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이 시나리오를 영화 화면으로 옮기는 것처럼 말이죠.
여행감독으로 일하기 전에는 시사 전문 잡지 <시사인>에서 20년간 기자로 일했어요, 물론 기자 일도 재밌었지만, 날이 갈수록 여행에 관심을 갖게 되고 삶의 무게중심이 여행으로 쏠리더라고요. ‘내가 50살이 됐을 때는 여행으로 여러 사람과 소통하고 싶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여행감독이라는 직업을 만들기로 마음을 먹었답니다.
Q. 혼자 여행 가기 무서울 때 같이 가줄 사람도 구해주고, 어디에서 묵을지, 무엇을 먹을지 등등 여행 코스까지 꼼꼼히 짜주는 건가요? 여행감독의 업무가 궁금합니다.
여행을 느긋하게 즐길지, 바쁘게 다닐지, 또 어떤 사람과 같이 갈 건지, 여행지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언제인지 알아보면서 코스를 짠답니다. 그리고 여행에도 주제의식이 필요해요. 사람들이 ‘아, 이 여행 정말 좋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작품성 있는 여행을 만드는 거죠.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요즘 ‘유배 여행’에 집중하고 있는데요, ‘유배’는 옛날 사람들이 죄를 지었을 때 아주 먼 곳으로 보내 살게 한 형벌이었어요. 제 눈에는 유배가 꼭 ‘강제로 가야 하는 여행’으로 보였죠.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너무 바빠 자신을 돌보지 못한 죄’를 지은 ‘죄인’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저 멀리 첩첩산중이나 흑산도, 보길도 등등 바다 건너 섬으로 보냈어요. 그 공간에서 모든 것을 비우고, 일상에서 벗어나면 점차 ‘내가 좋아하는 것’ 또는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찾을 수 있어요.
Q. 여행을 즐기는 방식도 연령대에 따라 다양할 것 같아요.
20대 여행객은 제가 굳이 제시하지 않아도 잘하고 있어요. 여행정보를 가장 많이 전하고, 소통하는 연령대거든요. 가족 단위로 여행하는 상품은 여러 도시와 지방에서 이미 많이 만들어놨고요. 또 60대 이상의 시니어 연령층은 시간과 돈의 여유가 많아 여행을 잘 즐기시고요.
저는 ‘관광’이 아닌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해요. 관광이 단순히 구경거리를 보는 즐거움이라면 여행은 거기에 의미를 더해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행에서 기쁨을 느낀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여행감독이 돼, 다른 사람들을 좋은 여행의 길로 이끌 수 있거든요.
Q.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여행감독이 될 수 있나요?
그럼요. 한 명 한 명이 모두 여행감독이 될 수 있죠. 어린이나 청소년도 가족과 가는 여행에 뛰어들어보세요. 부모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여행 일정 중 하루는 내가 정하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여기는 꼭 가보고 싶어!’라고 주장하는 거죠.
그러려면 단순히 블로그나 유튜브를 보면서 여행지를 공부하는 대신 여행지와 관련된 문학작품이나 명화, 영화가 있는지 먼저 알아보세요. 정확한 정보보다는 그 장소에 대한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 줄 자료를 찾으면 훨씬 의미 있는 여행을 할 수 있거든요. 너무 좋은 리뷰만 볼 게 아니라 부정적인 정보도 함께 검색해서 장점과 단점도 골고루 찾아보고요.
Q. 감독님이 가봤던 여행지 중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어디였나요? 최악의 여행지도 궁금해요.
늘 받는 질문이지만, 늘 대답하기 난감하네요. 가장 최근에 다녀와서 여운이 남는 곳은 전라남도 해남군 여행이었어요. 달마고도와 땅끝 마을 등등 멋진 유적지도 많이 봤지만, 그보다도 좋은 어른들을 만날 수 있었거든요. 해외 중에는 쿠바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쿠바는 굉장히 가난한 나라지만, 선진국 관광객들을 봐도 절대 기죽지 않습니다. 부유함을 부러워하지 않고, 아주 자존감이 높고 당당한 국민성을 보여요. 그러면서 춤과 노래를 유쾌하게 즐기고 타지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흔쾌히 곁을 내주고요.
‘최악의 여행지’라고 할 만큼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여행지는 없지만, 고생스러운 곳은 있었어요. 일행 중 한 분이 아프셨는데, 다른 여행자가 준 약을 먹고 더 위험해진 적이 있었거든요. 역시 약을 복용하는 데에는 의사와 약사와 상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죠. 이렇게 겪어보면서 ‘더 공부하고, 철저히 준비해야겠구나’ 하며 경험치를 쌓고 있어요.
Q. 코로나19 때문에 직접 여행 가기 힘든 요즘은 어떻게 일하세요?
여행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때는 여행상품을 공장의 컨베이어벨트처럼 툭툭 찍어낼 수 있지만, 지금은 상상력을 가지고 요리조리 주물러보면서 여행 시나리오를 알차게 다듬고 있습니다. 4인 이내로 팀을 짜서 국내 이곳저곳 여행 답사를 다니고 있어요.
지금은 캠핑카 500대로 개마고원에서 캠핑을 하는 ‘블록버스터 여행’을 계획 중이에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500마리 소떼를 몰고 가 남북교류의 물꼬를 텄듯 말이죠.
Q. 학생들이 의외로 여행 갈 시간이 많지 않아요. 공부도 해야 하고, 또 돈도 필요하고요. 멀리 가지 못하더라도 여행 기분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여행의 재미는 계획을 세우는 겁니다. 실제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내가 짠 계획을 확인하는 일이죠. 친구들과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곳을 정말 여행인 것처럼 생각하고 계획을 짜보세요. 코스를 설정하고,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보고, 일행들이 각자 챙겨야 할 임무도 맡겨보고요. 집 주위에 대단한 장소가 없어도 좋아요. 그 장소에 의미를 넣고 탐험하는 계획을 세우면, 그게 여러분의 첫 ‘여행 작품’이 될 겁니다.
■ 고재열 여행감독이 추천하는 우리나라 여행지
섬 여행을 추천해요. 우리나라에는 무려 4000여 개의 섬이 있어요. 수도권과 가까운 경기도에도 풍도, 육도, 국화도, 입파도 등등 멋진 섬이 참 많습니다. 특히 풍도는 야생화로도 유명한 섬이죠. 섬 여행은 육지 여행과는 달라요. 육지가 차려진 음식이라면 섬은 직접 만드는 음식과 같아요. 낚시, 모닥불 피우기처럼 여행자가 만들 수 있는 여행 요소가 충분하거든요. 마치 형광등 뒤가 더 어둡듯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히는 경기도의 여러 섬으로 여행을 꼭 가봤으면 좋겠습니다.
* 이 인터뷰는 경기도 어린이 신문 <내가 그린 꿈> 2021년 여름호 제휴 콘텐츠입니다.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인식하면 인터뷰 전체 영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정아 MODU매거진 기자 jeonga718@modu1318.com
글 전정아 ‧ 사진 손홍주, 경기관광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