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덕션 디자인을 쉽게 설명하면 영화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영화의 모든 시각적인 요소 즉, 캐릭터, 세트, 의상, 분장, 헤어, 미술품과 소품 등 전반적인 비주얼을 담당하는 사람이 바로 프로덕션 디자이너다. 또,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뮤지컬, 광고 등 무대와 영상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도 활동하며 영상에 담기는 전체적인 공간구조와 시각요소를 설계한다. 우리말로는 ‘미술감독’으로 더욱 익숙한 이 직업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어떤 일을 할까?
1. 시나리오 분석
시나리오를 읽고 영화의 미술적 요소를 파악하고 계획한다. 시나리오를 시각화하기 위해 기획 의도, 스토리, 드라마의 기승전결, 희로애락, 분위기, 장르를 분석한다.
2. 자료조사
직접 경험한 사실들 혹은 문헌, 영상, 자료, 고증 등 간접 경험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거나 생각을 전환, 확장하는 과정이다.
3. 콘셉트 디자인
시나리오를 근거로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영감을 스케치하고 이미지화하는 작업으로, 주로 일러스트레이션이나 그림(콘셉트 아트)으로 표현한다.
4. 캐릭터 디자인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은 캐릭터 디자인 작업을 통해 실존하는 인물로 구체화한다. 인물의 나이, 성격, 환경을 고려해 외양을 갖추게 된다.
5. 세트 디자인/데커레이션
시나리오의 모든 장소와 공간을 현실화하여 세트를 건축하는 세트 디자인, 그리고 실내 장식과 인테리어를 통해 공간을 연출하는 세트 데커레이션을 거친다.
6. 소품 디자인
상황에 맞게 연기자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연출 의도에 부합하는 소재와 재료를 연구해 소품을 제작한다.
7. 모델링 및 설계
3D 모델링을 통해 캐릭터, 세트, 소품 등 지금까지의 평면 작업을 입체화하며, 설계도를 제작한다.
8. 제작 및 사후 관리
아이템을 제작하고 세트를 시공하는 등 본격적인 제작 과정이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이것들을 관리하며, 촬영이 끝나면 보존이나 파손 등 사후 관리를 맡는다.
■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말하는 직업 이야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 그림을 펼쳐보세요”
강승용 미술감독
강승용 미술감독은 <안시성>, <판도라>, <사도>, <왕의 남자>, <효자동 이발사>, <실미도> 등 사극과 현대극을 아우르며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아왔다. 그는 미술감독이라는 직업을 ‘늘 새로운 영화에 빙의되는 존재’라고 말한다. 올해로 26년째 ‘영화판’에서 한길을 걸어오고 있는 그를 만나 영화미술 이야기를 들어봤다.
감독님의 손에서 탄생한 수많은 작품 중 <왕의 남자>나 <사도> 같은 독특한 느낌의 사극이 유독 인상 깊게 남습니다.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의 작업 뒷이야기가 궁금해요.
<왕의 남자>를 작업했을 때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우선 <왕의 남자> 이전의 사극에서 조선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제작 여건 탓이겠지만 ‘세련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힘이 약하고, 궁핍한 조선이 아닌 아름답고 화려한 우리 궁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죠. 그래서 한국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 동양문화를 비교·학습하기도 했어요. 또, 극 중에서 광대로 나오는 장생과 공길은 어떻게 보면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인생이기도 하잖아요. 이러한 사회 하층민들이 최고 권력까지 올라가는 과정을 보여주려면 바닥부터 정점까지 간극을 벌려 최대한 화려하게 그려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를 통해 신분 차이를 극대화한 것이죠. 당시 조선의 아름다운 색채와 분위기 등 궁중문화에서의 최고점을 끄집어내어 영화에 표현했습니다. 영화에서 보이는 패턴 하나, 문짝 하나까지 고증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사극의 경우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돌아가 과거를 완벽히 재현해야 하기에 쉽지 않은 작업이었겠군요.
네. 시대물은 역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고증이 정확해야 해요. 창작을 하려면 고증을 통해 설득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먼저 고증하는 방법을 공부하고 나서 창작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공부란 그 시대의 건축 양식을 포함해 색이나 복식, 분장, 문화에 대한 사료를 찾아서 연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사극을 작업하려면 조선의 5대 궁궐 구조는 다 꿰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죠. 동양의 오방색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아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런데 공부만 해서는 되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요? 미술감독이 영감을 얻는 노하우가 따로 있나요?
시나리오를 보면서 자료를 찾거나 아이디어를 떠올리려고 하면 그 때는 이미 늦었다는 뜻이에요. 평소에 책이나 사진, 이미지, 영상 등 무수한 콘텐츠를 빨아들이듯 흡수하여 머릿속에 누적되어 있어야 하죠. 누적은 단순한 기억과는 달라요. 내가 관심 있는 어떤 내용을 접하면 파고들어가서 여러 자료를 찾아보면서 머릿속 도서관에 저장해놓는 거죠. 그러다가 시나리오를 읽으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그림이 있을 거예요. 이것은 딱히 암기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누적해온 정보가 조합된 것이거든요. 100% 글자로만 구성된 시나리오에서 단어가 그림으로 구현되는 순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기획 단계에서 기존의 작품이나 자료들을 계속 찾아봐야 해서 모방할 수밖에 없게 되죠. 따라서 기록을 누적하는 훈련이 어느 정도 필요해요. 저에게는 문자 중독증, 영상 중독증 같은 것이 있어요. 휴대폰을 봐도, 휴식하러 여행을 가도 가만히 있으면 막 불안한 거죠. 미술감독의 직업병이에요.(웃음)
매번 새로 세트장을 짓고, 소품을 만들며 영화 속 현실과 똑같은 공간을 창조하는 프로덕션 디자이너로서 가장 희열을 느꼈던 순간이 있다면요?
<안시성>의 마지막 전투 장면이 떠오르네요. 당나라 군대에서 안시성을 정복하기 위해 성벽보다 높은 토산을 쌓아서 공격하는 장면이에요. 영화를 찍기 전에 역사 공부를 할 때도 ‘토산이 어떻게 생겼을까’가 궁금했거든요. <구당서>라는 역사서에 ‘토산을 쌓고 안시성을 공격했다’라고 단 한 줄로 적혀 있는 대목을 실제로 구현해야 하잖아요. 과연 어떤 구조와 형태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력을 동원해 쌓았을까, 어떻게 100만 대군이 넘어왔을까 등 숙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저는 너무 재미있었어요. 포클레인으로 실제 높이 40미터의 토산을 쌓고, 무려 5000평 규모의 세트를 세워 기억에 남는 명장면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미래의 프로덕션 디자이너를 꿈꾼다면 청소년 시절 어떤 활동을 해보는 것이 좋을까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두루 교류해보길 권하고 싶어요. 가령 ‘청소년 영화학교’라는 곳에서 시나리오, 촬영, 편집, 프로덕션 디자인 등 한 명씩 역할을 분담하고 공동 작업을 하면서 협업 시스템을 몸소 체험해보세요. 스마트폰으로 짧은 1분 영상을 혼자서 만드는 것보다 색다른 경험이 될 거예요.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즐기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조각과 영상 예술을 전공했는데요, 꼭 전공하지 않아도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무언가를 학습한다고 해서 ‘잘’하는 건 아니잖아요!
감독님이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을 말씀해주세요.
처음으로 각본과 연출을 맡은 영화가 올해 개봉할 예정이에요. <화평반점>이라는 작품인데, 1980년 5월 광주를 배경으로 가족 3대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인 화평반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1995년 <테러리스트>라는 영화로 처음 일을 시작했는데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작업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늘 새롭고, 관습적이지 않으려고 했어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쭉 일하며 현장에서 은퇴하는 게 저의 꿈이자 목표입니다.(웃음)
이은주 MODU매거진 기자 silver@modu1318.com
글 이은주 ‧ 사진 이동훈, 강승용 제공 ‧ 참고 자료 <프로덕션 디자이너>

영화 '사도' 캐릭터디자인 컨셉 드로잉.사진 강승용 제공

강승용 프로덕션 디자이너.사진 이동훈

영화 '왕의 남자' 등장인물의 의상 스케치. 캐릭터의 성격에 맞게 의복 색감을 설정했다.사진 강승용 제공

영화 '안시성' 대규모 전투 장면에 등장한 토산의 콘셉트 드로잉. 외형과 구조를 잡고, 질감을 살리기 위해 외국의 해적선을 참고하기도 했다.사진 강승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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