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루언은 미디어가 단순히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메시지 기능이 있으며 인간의 특정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유도한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미디어를 적극적인 창조의 매체, 의사소통을 위한 새로운 채널로 표현한 고 백남준 씨의 작품
<다다익선>(과천 현대미술관 소장) 한겨레 자료사진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맥루언의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1964년)은 그 제목의 뒷부분을 잘 볼 필요가 있다. 저자의 의도를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맥루언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는 바로 ‘인간의 확장’이란 개념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책을 시작하고 있다.
“전기 기술 시대에 접어들고 1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는 공간과 시간을 제거하며 중추신경 조직 자체를 전(全)지구적 규모로 확장해왔다…매우 급속하게 인간 확장의 최종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맥루언이 ‘중추신경 조직의 전지구적 확장’이라고 한 것은 그 특유의 개념과 어법으로써, 교통망이나 정보통신망 등을 인간 중추신경조직의 연장이나 확장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1960년대에 맥루언의 이론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충격적이었다. 맥루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책의 앞과 뒤에 발간된 두 저서를 함께 보는 것이 좋다. 그 하나는 <구텐베르크 은하계: 활자 인간의 형성>(1962년)이고, 다른 하나는 <미디어는 마사지다>(1967년)라는 책이다. 앞의 책에서 맥루언은 서구의 알파벳과 인쇄술로부터 나온 기계적 기술의 의미를 탐구하면서, 이런 탐구의 연장선상에서 다음 저술을 예고했는데, 그 책이 바로 ‘미디어의 이해’이다. 그의 말대로 “이 책은 각종 기술들에 의해 확장된 우리 자신의 갖가지 기관들의 윤곽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다. <미디어는 마사지다>에서는 앞의 책에서 주장한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개념을 보완한다. 그는 미디어가 단순히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용기라는 통념을 거부하고 그 자체로 메시지의 기능이 있음을 일깨우는 데서 더 나아가, 미디어는 인간 두뇌의 특정 부분에 마사지를 가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특정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갖도록 유도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맥루언의 이론에 대한 오늘날 일반적인 해석이다. 이제 그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정리한다면, 그 학문적 공헌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 첫째는 맥루언이 본격적으로 ‘도구의 철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도구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 이해의 첩경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 실례를 들어 밝힌 것이다. ‘도구학’이 곧 인간학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두 번째 공헌은, 매체의 비매개적인 성격을 암시했다는 데에 있다. 매체(media)는 인간 관계를 매개(mediate)하지만, 인간과 매체 자신은 비매개적으로 곧 즉각적(im-mediate)으로 밀착한다. 사람들은 점점 더 휴대전화, 인터넷 등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매체는 매개하지만 그 자신은 인간과 비매개적 관계를 형성한다는 역설을 그의 책들은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종합해 보건대, 맥루언 사상은 그의 책제목을 뒤집어서 좀 도발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이해: 미디어의 확장’이라고 말이다.
혹자는 맥루언의 저서는 제목과 달리 ‘이해’가 아니라 ‘난해’하기 짝이 없다고 한다. 그의 저서들이 근거 없는 단언과 비약, 수많은 은유와 직관적 주장들로 난삽하다고 비판한다. 더 나가면 ‘횡설수설’한다는 비난에 이른다. 하지만 이런 비판들은, 그의 말이 너무 진지하기 때문에, 그의 말에 대단한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말이 기존 학계를 놀리고 있는 것 같기 때문에, 어떤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학자들이 질서정연한 논리적 구성을 가진 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다. 사실 그의 저술에 담긴 사상은 설명하기보다, 생각의 화두를 툭툭 던지는 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여기 맥루언의 말들(따옴표 친)과 그의 책을 읽으며 떠오른 화두들을 그의 스타일로 횡설수설하듯이 몇 마디 던져 놓는다. 상상력 풍부한 청소년들에게는 설명보다 더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도구를 만든다. 그 다음에는 도구가 우리를 만든다.”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고, 도구가 사용을 유도하며, 생산이 욕구를 유발한다. “전깃불은 순수한 정보다.” 오늘날 시민단체는 단체적 시민이라는 미디어다. “오늘날 우리는 훈육보다는 발견을 훨씬 더 중요시하는 새로운 교육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사람이 미디어다. 김용석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혹자는 맥루언의 저서는 제목과 달리 ‘이해’가 아니라 ‘난해’하기 짝이 없다고 한다. 그의 저서들이 근거 없는 단언과 비약, 수많은 은유와 직관적 주장들로 난삽하다고 비판한다. 더 나가면 ‘횡설수설’한다는 비난에 이른다. 하지만 이런 비판들은, 그의 말이 너무 진지하기 때문에, 그의 말에 대단한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말이 기존 학계를 놀리고 있는 것 같기 때문에, 어떤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학자들이 질서정연한 논리적 구성을 가진 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다. 사실 그의 저술에 담긴 사상은 설명하기보다, 생각의 화두를 툭툭 던지는 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여기 맥루언의 말들(따옴표 친)과 그의 책을 읽으며 떠오른 화두들을 그의 스타일로 횡설수설하듯이 몇 마디 던져 놓는다. 상상력 풍부한 청소년들에게는 설명보다 더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도구를 만든다. 그 다음에는 도구가 우리를 만든다.”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고, 도구가 사용을 유도하며, 생산이 욕구를 유발한다. “전깃불은 순수한 정보다.” 오늘날 시민단체는 단체적 시민이라는 미디어다. “오늘날 우리는 훈육보다는 발견을 훨씬 더 중요시하는 새로운 교육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사람이 미디어다. 김용석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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