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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푸른광장 가는 길은 좁고도 험하다

등록 2006-05-28 16:03수정 2006-05-29 14:17

<광장>의 작가 최인훈(사진)은 주인공 이명준을 통해 1960년대 좌우 이념 대립의 실상과 현실적 모순을 보여준다. 명준이 택한 ‘제3의 길’은 자유주의적 유토피아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사이로 난, 좁고 험한 길이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광장>의 작가 최인훈(사진)은 주인공 이명준을 통해 1960년대 좌우 이념 대립의 실상과 현실적 모순을 보여준다. 명준이 택한 ‘제3의 길’은 자유주의적 유토피아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사이로 난, 좁고 험한 길이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문학 속 철학산책 /

최인훈의 <광장>을 통해서 본 ‘유토피아’의 의미

최인훈의 <광장>은 한국문학 사상 최초로 분단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문제로 다룬 기념비적 작품이다. 1960년 <새벽> 10월호에 처음 발표된 이 소설은 6. 25 전쟁 후 석방포로를 싣고 인도로 향하는 배에 탄 이명준이라는 한 젊은이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8. 15 해방 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명준은 자유주의 남한 사회에는 부도덕한 개인의 자유가 허락되는 어두운 밀실만 있을 뿐, 사회적 정의가 구현되는 푸른 광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해방직후 월북한 아버지를 찾아 북으로 간다. 그러나 명준이 북에서 만난 사회주의 사회 역시 푸른 광장이 아니고 잿빛 광장이었다. 모든 개인적 밀실이 사라진 이 광장에서 인민들은 혁명의 열기를 잃고 당원들마저 소비에트 교시만을 내세우며 타락했다.

실망한 명준은 국립극장 발레리나인 은혜를 만나 사랑을 하고 그들만의 광장을 꿈꾼다. 하지만 이때 6. 25가 터져 명준의 아이를 임신한 은혜가 전사한다. 포로가 된 명준은 수용소에 갇혔다가 석방이 될 무렵, 남한과 북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입장에 서게 된다. 자유주의 남한사회와 사회주의 북한사회 모두에 실망한 명준은 제 3국인 중립국을 택하고 인도로 가는 배에 오른다. 뱃머리에서 긴 회상에 잠겼던 명준은 자기가 참으로 오랫동안 ‘이데올로기라는 잣대’에 홀려있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리고는 바다로 뛰어든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단된 우리민족이 꿈꾸는 유토피아에 대한 고통스럽고도 서글픈 이야기이다. 1516년 출간된 토마스 모어의 저서 <유토피아>에서 처음으로 나온 ‘유토피아’라는 말은 사회의 각종 제도를 개선함으로써 이루려는 현실적 이상사회를 뜻한다. 때문에 유토피아는 출발부터 정치적·사회적 이데올로기와 관계를 맺고 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고민했던 밀실과 광장의 문제가 들어있다. 곧 자유냐 평등이냐, 시장이냐 정부냐, 개인이냐 공동체냐 라는 소위 우파와 좌파의 문제들이 맞부딪쳐 있다.


<광장>에서 주인공 명준이 제 3의 중립국을 선택하고 길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영국의 사회학자 앤소니 기든스가 그의 저서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나 <제3의 길>에서 제시한 ‘제 3의 길’과 연결시켜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다. 기든스도 명준처럼 자유주의 유토피아와 사회주의 유토피아 모두가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실패했다 해서 유토피아에 대한 이상과 꿈마저 버릴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제 3의 길을 제시한다.

제3의 길이란 거칠게 말하자면 자유주의적 유토피아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그 중간으로 난 길이다. 이 길은 자유가 보장된 평등과 평등이 전제된 자유를 추구하는 길이고, 경쟁이 보장된 협동과 협동이 전제된 경쟁을 지향하는 길이며, 또한 사생활이 보장된 유대와 유대가 전제된 사생활을 전망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언뜻 보아도 이 길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자유를 보장하면 평등이 깨어지고, 평등을 전제하면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경쟁을 허락하면 협동이 무너지고, 협동을 유지하면 경쟁이 되지 않는다. 또한 개인의 사생활을 내세우면 공동체의 유대가 이루어지지 않고, 공동체의 유대를 내세우면 개인의 사생활이 침해된다.

<광장>에서 명준이 보여준 좌절과 절망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기든스도 서구 민주주의 역사를 통해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밀실과 광장이 하나가 되는 어떤 기적적인 ‘제3의 유토피아’를 설계하는 일은 감히 꿈꾸지도 못했다. 단지 명준이 찾던 푸른 광장, 곧 인간이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진정한 삶의 공간으로 향하는 제3의 길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기든스가 말하는 제3의 길은 절대적·상대적 빈곤과의 전쟁, 폭력과 고통의 감소,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 전제권력에 대한 대립, 민주주의의 민주화, 행복과 자기실현의 성취, 파괴된 환경의 구제 등을 지향하며 ‘보다 나은 곳’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는 머나먼 여정이다. 이 길은 결코 넓지도 않고 평탄하지도 않으며 때로 잘 보이지도 않는다. 마치 스킬라와 카립디스 사이를 빠져나가는 오디세우스처럼, 줄 위에 선 광대처럼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걸어야할 험하고 가느다란 샛길이다. 그럼에도 기든스는 이 길을 따라가면 언젠가는 명준이 찾던 푸른 광장에 다다를 희망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 말을 믿고 싶다. 이어 이런 생각도 함께 해본다.

어쩌면 명준이 마지막에 희미하게나마 보았던 길도 바로 이 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당시로는 유일한 제 3의 길이었던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 게 아닐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그에게는 이 길을 찾아갈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래서 바다로 뛰어든 게 아닐까?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만은 분명하다.

김용규/자유저술가,  저자
김용규/자유저술가, 저자
너희는 갖고 있는가? 이상사회를 향한 뜨거운 소망을! / 자유와 평등을 양립시키려는 강건한 의지를! / 경쟁과 협동을 조화시키려는 준엄한 정의를! / 개인과 집단을 화해시키려는 영특한 지혜를! /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들을 실현하기 위한 자기희생적 도덕심을 너희는 진정 갖고 있는가? /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진정 그렇지 않다면 / 너희도 언젠가는 이토록 아픈 가슴으로 쓸쓸하고 황량한 길을 갈 수밖에 없으리라. /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광장’으로 향하는 길은 / 이 모든 것들이 함께 모여야만 비로소 어렵사리 열리는 좁은 길이기 때문에!

김용규/자유저술가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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