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는 <변신>을 통해 가족 사이의 사랑조차 경제적인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부인하고 싶은 진실을 드러낸다.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가족관계는 비현실적인 것인가. 한겨레 자료사진
문학속 철학산책/
카프카의 <변신>을 통해 본 ‘가정’의 의미
가정이란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겠다. 그런데 가브리엘 마르셀이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가정을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라고 했다. 조금 어렵고도 생뚱한 말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가정이란 사람이 그의 ‘어떠어떠함’, 곧 외모나 성격, 재능 또는 재산 등등 때문에 인정받고 사랑받는 장소가 아니라, 그의 ‘있음 그 자체’, 곧 존재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장소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못생긴데다, 사교적이지 못하고, 특별한 재능이나 재산마저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는 사회에서 인정받거나 사랑받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마르셀의 주장이다. 가정이란 가족 중 그 누가 설령 못생겼다고 해도, 또는 사교적이지 못하다고 해도, 특별한 재능이나 재산이 없다고 해도 그의 ‘있음 그 자체’를 기뻐하고 사랑하는 장소, 또 그래야만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체코 출신의 천재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바로 이런 물음과 함께 살펴볼 만한 작품이다. 직물회사 외판원인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한 마리 흉측한 곤충으로 변한다. 그런데 외모만 변한 것이 아니다. 변신을 통해 그는 그동안 가족을 먹여 살리던 부양자에서 오히려 가족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기생자로 탈바꿈되었다. 곧 그의 ‘어떠어떠함’이 변한 것이다. 그러자 얼마 가지 않아 사랑하던 여동생마저 “옆방의 물건은 치워야 한다”는 식으로 냉대한다. 그래서 그는 홀로 죽음을 맞는다. 가족들은 신께 감사드리고 그간의 악몽을 잊기 위해 교외로 소풍을 간다.
이 작품을 통해 카프카가 보여주는 무서운 진실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 곧 가족간의 사랑조차 경제적인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통찰이다. 설사 가족이라고 해도 그의 ‘어떠어떠함’, 특히 경제적 관계가 변했을 경우 따라서 변한다는 것을 카프카는 흉측한 곤충으로의 변신이라는 기발한 극적 장치를 이용하여 보여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아마도 소설이니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렇게 믿고 싶어서 일 것이다.
하지만 신문을 보자! 우리 주변에서는 이보다 더한 일들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보험금을 타려고 아내나 남편을 살해하는 사람들, 심지어 어린 자식을 버리는 부모들이나, 늙고 병든 부모를 내다 버리는 자식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옆방의 물건은 치워야 한다”는 것이겠다. 물론 나름대로 사정이야 있겠지만, 어쨌든 이러한 일들은 가족의 ‘있음 그 자체’를 기뻐하고 사랑해야만 하는 가정, 곧 마르셀이 말하는 가정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또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인간 본성이 원래부터 이악해서일까? 아니면 오늘날에 와서 가족간의 사랑이 그만큼 줄어든 것일까? 도대체 웬일일까?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인간 소외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인간 소외란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일을 말한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현대인의 인간 소외가 자본주의의 본질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찍이 막스 베버가 그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의 본질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체계적인 이윤 추구의 정당화”이다. 따라서 그것의 윤리는 “돈을 벌고 더욱더 많이 버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낳은 이러한 폐단에 대해 칼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날카롭게 지적했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부르주아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적나라한 이해관계, 냉정한 현금 계산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남겨두지 않았다.…인격의 가치를 교환의 가치로 해소시켜버렸고,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했던 무수한 자유를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단 하나의 파렴치한 상업적 자유로 바꾸어버렸다.…부르주아지는 가족 관계 위에 드리워진 그 감동적인 감상의 포장을 찢어버리고, 그것을 순전히 금전관계로 만들어버렸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옆방의 물건은 치워야 한다”라고 외치는 그레고르의 가족들의 비인간성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리고 누이동생이 아니라 가족관계마저도 금전관계로 돌려버린 자본주의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어린 자식의 손을 길거리 한복판에서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며, 자식이 늙은 부모를 관광지에 내다 버리는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가 풀어놓은 ‘악령’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악령이란 본래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체 안에서만 살아날 수 있는 존재이다. 때문에 어찌 모든 탓이 자본주의에만 있겠는가! 하지만 마르크스가 지적한 이 악령이 지금도 우리 사회를 떠돌며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악령에 붙잡힌 채 이기심과 이윤 추구에 몰두하여 비인간의 길을 계속 가야 할까, 아니면 인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새롭게 찾아야 할까?
만일 우리가 자본주의가 만든 ‘흉측한 곤충’으로가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고 싶다면, 조금은 생뚱하게 들리는 마르셀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마르셀은 인간의 모든 인간다움은 상대의 ‘어떠어떠함’이 아니라 그의 ‘있음 그 자체’만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관계, 곧 가족관계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는, 사회가 사회답기 위해서는 ‘가족적’이어야 한다고도 했다. 동의하는가? 한번 생각해보자. 김용규/자유저술가, <지식을 위한 철학통조림> 저자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인간 본성이 원래부터 이악해서일까? 아니면 오늘날에 와서 가족간의 사랑이 그만큼 줄어든 것일까? 도대체 웬일일까?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인간 소외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인간 소외란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일을 말한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현대인의 인간 소외가 자본주의의 본질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찍이 막스 베버가 그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의 본질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체계적인 이윤 추구의 정당화”이다. 따라서 그것의 윤리는 “돈을 벌고 더욱더 많이 버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낳은 이러한 폐단에 대해 칼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날카롭게 지적했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부르주아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적나라한 이해관계, 냉정한 현금 계산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남겨두지 않았다.…인격의 가치를 교환의 가치로 해소시켜버렸고,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했던 무수한 자유를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단 하나의 파렴치한 상업적 자유로 바꾸어버렸다.…부르주아지는 가족 관계 위에 드리워진 그 감동적인 감상의 포장을 찢어버리고, 그것을 순전히 금전관계로 만들어버렸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옆방의 물건은 치워야 한다”라고 외치는 그레고르의 가족들의 비인간성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리고 누이동생이 아니라 가족관계마저도 금전관계로 돌려버린 자본주의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어린 자식의 손을 길거리 한복판에서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며, 자식이 늙은 부모를 관광지에 내다 버리는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가 풀어놓은 ‘악령’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악령이란 본래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체 안에서만 살아날 수 있는 존재이다. 때문에 어찌 모든 탓이 자본주의에만 있겠는가! 하지만 마르크스가 지적한 이 악령이 지금도 우리 사회를 떠돌며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악령에 붙잡힌 채 이기심과 이윤 추구에 몰두하여 비인간의 길을 계속 가야 할까, 아니면 인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새롭게 찾아야 할까?
김용규/자유저술가, 〈도덕을 위한 철학통조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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