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망국병’ 과외잡기·일부 문제질 떨어져
97년 국·영·수 위주 지필고사…교사도 쩔쩔
97년 국·영·수 위주 지필고사…교사도 쩔쩔
14차례의 크고작은 변화를 겪은 우리 입시 제도에서 본고사는 모두 6차례 치러졌다. 해방 뒤 약간의 단절만 겪으면서 이어져 오던 본고사가 본격적으로 폐지된 것은 80년 신군부의 ‘7·30 교육개혁 조치’를 통해서다.
당시 한 언론은 이 조처가 “과외로 인한 빈부 간의 위화감을 없애고 수험생들을 입시의 이중고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며 시민들도 “적자 살림에서 벗어나게 돼 시원하다”는 반응이었다고 보도했다. 당시 고려대 교수였던 박도순 전 교육과정평가원장은 “망국병으로 지적되던 과외를 잡기 위해 과외의 주요인인 본고사를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며 “일부 대학에서는 본고사 지문에 문제의 답이 들어 있는 등 그 질이 떨어졌고, 도쿄대나 모스크바대학 문제 등이 여과없이 출제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때 폐지된 본고사는 학생 선발권을 확대시켜 달라는 대학의 거센 요구로 말미암아 14년 뒤인 1994년 ‘대학별 고사’라는 이름으로 부활된다. 하지만 대학들은 다양한 전형 요소를 활용해 창의적 인재를 뽑으려 하기보다, 국·영·수 위주의 지필고사를 치름으로써 또 다시 본고사 논란에 휩싸인다. 이름 밝히길 꺼린 서울대 96학번 장아무개씨는 “모두 본고사라 불렀고, 도쿄대 수학 문제집을 푸는 친구들도 있었다”며 “선생님들도 풀지 못해 쩔쩔맸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박대림 교육인적자원부 대학학무과 사무관은 “(당시) 수능시험, 내신을 합쳐 국·영·수만 세 번이나 평가하는 바람에 고교 교육이 국·영·수 위주로 흘러 왜곡됐다”고 말했다.
학생뿐만 아니라 대학들도 본고사 출제를 부담스러워했다. 박 교수는 “본고사가 자리잡지 못한 것은 대학들이 출제할 만한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94년 대학별 고사 도입 당시에는 시행 대학이 너무 적어 교육부가 시행을 독려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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