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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너나 구별없는 동사의 역동성

등록 2008-01-13 15:06

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

[난이도 = 중등~고1]

11. 품사의 세계 - 동사와 명사 ③

12. 품사의 세계 - 동사와 명사 ④

13. 품사의 세계 ― 동사와 명사 ⑤

몇 달 전에 휴대전화를 새로 장만했다. 이 전화기는 문자메시지가 오면 “You got mail”하고 짤막한 노래를 들려준다. 그대로 풀면 “당신은 메시지를 받았습니다”다. 이걸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옮기면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가 된다. 영어에서는 ‘당신’이 주어였는데, 한국어에서는 ‘메시지’가 주어가 됐다.


영어에서 “I have a cold”(나는 감기를 갖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말에서는 “감기가 들었다”고 한다. “I have a headache”(나는 두통을 갖고 있다)는 “머리가 아프다”다. “I have some money”는 “나는 돈이 좀 있다”가 된다. 하나같이 영어에서는 사람이, 한국어에서는 사물이 주어다.

영어에서 주어는 대개 사람이고 목적어는 주로 사물이다. 영어사용자들은 사람과 사람 아닌 것, 살아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엄격하게 구별한다. 그래서 능동사를 취하는 주체는 거의 언제나 사람이다. 사물은 어디까지나 행위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다. 영어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전제로 한 언어다.

영어에서는 무생물이 주어 자리에 오면 문장이 거의 다 수동태가 된다. 무생물은 능동사를 거느릴 수 없다. 왜?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능동성이 없기 때문에. 하지만 한국어는 그렇지 않다. 무생물이 당당하게 능동사를 거느린다: 전기가 나갔다, 불이 들어왔다, 수돗물이 나온다, 찌개에 두부가 들어갔다, 후식으로 수박이 나왔다, 허허벌판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고층건물이 올라간다….

한국사람들은 자기가 돌멩이를 던지면서도 “돌멩이가 날아간다”고 한다. 자기가 연락을 할 거면서도 “연락이 갈 겁니다” 한다. 치마에 꽃무늬 자수를 넣은 건 분명히 사람일 텐데 “꽃무늬가 들어간 치마”라는 표현을 쓴다.

비는 무슨 볼일이 있어서 우리한테 ‘오는’ 걸까? 해는 뭘 구경하려고 서산을 ‘넘어가는’ 걸까? 의자는 돌부리에라도 걸려서 ‘넘어진’ 걸까? 한국어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있다. 살아서 꿈틀꿈틀 움직인다. 앞에 나온 감기도 그렇지만, 한국사람들은 병이 생겨도 “병이 들었다”고 하고 병이 나으면 “병이 나갔다”고 한다.

수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표현들은 넓은 의미의 의인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을 마치 사람처럼 대접하는 것이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무생물을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여기는 물활론 또는 범심론의 냄새가 난다. 예로부터 한국어사용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왔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살아 있기 때문에 한국어에서는 모든 사물이 주어가 된다. 모든 것은 움직이기 때문에 한국어에서는 동사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명사는 상호 분리를 전제로 한다. 세상에 널린 사물들을 이것과 저것으로 똑 부러지게 나누어야 명사가 성립한다. 명사의 세계는 당구공들이 굴러다니는 당구대와 비슷하다. 공들은 각자 따로따로 존재한다. 그러다 가끔씩 서로 부딪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모든 공은 항상 그 모습 그대로다. 명사는 굳어 있는 세계다. 이미 결정된 세계다.

동사는 상호결합 혹은 상호침투의 세계다. 마치 끓는 호박죽처럼, 모든 존재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서로 섞여들고 변화해가는 세계다. 그래서 두루뭉수리하고,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가 없다. 동사의 세계에는 너와 나의 구별도 없고, 산 것과 죽은 것의 구별도 없다. 모든 것이 한 덩어리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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