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광고 박홍렬(왼쪽)군과 조주희(오른쪽)교사가 독서일기 형식으로 쓴 일기장을 펼쳐보며 웃고 있다. 박군은 "이 일기장에 나오는 70여 권의 책은 갖가지 고민을 들어주고 앞으로의 미래를 계획하게 도와준 상담사나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진로 교육
“여기 이 부분이에요. 이 책을 읽고 느낀 걸 일기로 썼었어요.”
서울 대광고 3학년 박홍렬(18)군이 상기된 얼굴로 2006년 11월 7일에 쓴 일기를 펼쳤다. 예술계 전방위에서 활동하는 김형태씨가 ‘이태백 세대’의 고민을 상담해준 <너, 외롭구나>(예담)에 대한 소감이 빼곡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박군은 ‘심리상담가’라는 꿈을 접고 있었다. 어른들과 세상이 강조하는 ‘돈 많이 벌고, 안정적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질 것 같은가?”라며 모질게 묻는 김형태씨의 글을 읽어내려가면서 점점 ‘열정’을 버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특히 ‘자신이 좋아하고 관심 있는 일을 재밌게 하다보면 저절로 돈이 모인다’는 충고가 인상적이었어요.”
결국 박군은 진학설계를 다시 했다. ‘취업할 분야가 많다’는 소문만 듣고 택했던 이과를 버리고 꿈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 문과를 선택한 것이다. “진로 문제로 방황하면서 떨어진 성적이 쉽게 오르긴 힘들겠지만 목표가 있어서 그런지 공부할 의욕이 생긴다”고 말하는 얼굴에선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왜 공부? 의문땐 ‘학문의 즐거움’ 등 도움 뒤늦게 고민 않도록 초등생때부터 교육을 물론 꿈에 대해 확신을 하기까진 1학년 때 담임이었던 조주희 교사(문학 담당)의 공이 컸다. 조 교사는 평소 ‘일기쓰기’와 ‘맞춤형 책소개’로 학생들의 진로 고민을 해결해주고 있다. 반 아이들에게 일년 내내 일기를 쓰게 하고 여기에 답글을 달아주면서 학생의 진로고민에 맞는 책을 추천해준 지 벌써 4년째다. 그동안 공부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학생에겐 <학문의 즐거움>(김영사)과 <마사이 전사 레마솔라이>(황소자리)를, 자퇴를 결심한 학생에겐 <19세>(세계사)를, 습관적으로 자학을 하는 학생에겐 <오이대왕>(사계절)을 권해주는 식으로 도움을 줬다. 연세대 국문과 2학년 김승용(20)씨도 조 교사에게 추천받은 다양한 책으로 진로 결정을 확실하게 할 수 있었다. 수학, 과학 성적이 나쁘지 않아 이과를 택하려고도 했지만 막상 조 교사가 추천해준 이 분야의 교양도서를 보니 전공까지 하기엔 무리다 싶었다고 한다. 반면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기형도의 시 등이 담긴 인문교양서는 문학에 대한 새로운 꿈을 키우게 해줬다. 결국 그는 “이런 게 대학에서 배우는 문학이라면 한 번 해보고 싶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이처럼 진로 결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책의 도움을 받은 사례가 많은 것은 아니다. 많은 학생들이 진로교육의 기초인 ‘자기이해’ 조차 못한 채 진학을 하고, 고등학교까지 오는 일이 많다. 진로교육에 대해 무심한 탓도 있고, 관심이 있어도 왜곡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할모델에 관심이 많은 부모들은 무조건 위인전을 사주고 진로교육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때론 부모가 원하는 분야의 위인전만 주입식으로 읽고 자라는 아이들도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부모들일수록 아이가 자기 적성을 금방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지만 이는 좌절로 끝날 때가 많다"고 말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나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는 학생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조 교사는 “이렇게 자신에 대해 모르는 학생들에겐 그림책을 보여주는 게 특히 좋다”고 말했다. <빨간 늑대>(베틀북), <소피가 정말 화나면, 정말 화나면>(케이유니버스)과같이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고,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잘 다스리는 방법 등을 가르쳐주는 그림책들은 그가 수업 시간 짬짬이 소개했던 책들이기도 하다. 그림책은 그림 위주로 돼 있어 관심을 끌기도 쉽고, 그 안에 온갖 상징요소가 많아 학생 개개인의 해석을 들어보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서울 광희초등학교에서 창의적재량시간에 독서로 진로수업을 하는 청소년직업전문상담사 양성연씨는 “뒤늦게 기본적인 진로고민을 하는 아이들이 나오지 않기 위해선 초등학교 시절부터 단계별 진로교육을 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요즘 광희초 5,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림책으로 진로교육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자존감, 자신감 키워주기, 직업의식 갖기 등 기본적인 과정 가운데 ‘나를 긍정하는 법’을 알려주려고 두 권의 책을 함께 읽었다. 단점이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짧은 귀 토끼>(고래이야기)와 사소한 능력도 소중한 능력이라는 걸 알려주는 <나는 내가 좋아>(중앙출판사)가 그 책들이다. “책 한 권으로 학생이 당장 변해야 한다는 생각은 절대 안 됩니다. 어떤 책 한 구절 덕분에 아이의 심경이 바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죠. 길을 찾아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도록 도와주고 그 과정을 함께 지켜보는 게 바로 진로교육이잖아요.” 대광고 조 교사는 부모가 책을 권하기에 앞서 스스로 ‘진로’의 의미부터 천천히 곱씹어보라고 충고했다. 글· 사진 김청연 기자 carax3@hani.co.kr
‘역할모델’ 맹신 말고 과정 보게 해야 ◎ 인물 책 소개할때 주의점 이순신, 세종대왕, 유관순 자리를 안철수, 반기문, 한비야가 차지하고 있다. 요즘 학생들이 보는 인물 관련 책들은 고대의 정치가나 전쟁영웅만을 소개하지 않는다. 큰 업적을 남기고 죽은 ‘위인’들의 전기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 시대가 주목하는 건 그들보다는 친숙한 인물들이다. 현존하는 이 인물들은 하는 일도 다양하다. 독서 진로교육에서 많이 쓰이는 책인 <나는 무슨 씨앗일까?>(샘터)에는 자연과학자부터 농부, 호텔 총주방장, 화가까지 등장한다. 이는 직업이 다양해진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하면서 역할모델에 대한 신화도 깨주고 있다. 나라를 구해야만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게 아니라 농부와 화가도 이 사회에서 얼마든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변화한 인물 관련 책들이 학생들에게 현실적인 직업관을 심어주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화로 기록될만큼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어서 조심할 부분도 많다. 살아있는 인물이니만큼 그의 행보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위험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6년에 터진 ‘황우석 사태’는 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대표적 사례다. 청소년직업전문상담사 양성연씨는 “그런 점 때문에 인물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누군가가 어떤 태도로 어려움을 이겨냈는지 등 과정 위주로 독서 진로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업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배우는 수준에서 역할모델을 적절히 활용하게 하라는 말이다. “역할모델을 신화처럼 맹신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는 이 충고는 독서 진로교육에서 교사와 학부모의 구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김청연 기자
왜 공부? 의문땐 ‘학문의 즐거움’ 등 도움 뒤늦게 고민 않도록 초등생때부터 교육을 물론 꿈에 대해 확신을 하기까진 1학년 때 담임이었던 조주희 교사(문학 담당)의 공이 컸다. 조 교사는 평소 ‘일기쓰기’와 ‘맞춤형 책소개’로 학생들의 진로 고민을 해결해주고 있다. 반 아이들에게 일년 내내 일기를 쓰게 하고 여기에 답글을 달아주면서 학생의 진로고민에 맞는 책을 추천해준 지 벌써 4년째다. 그동안 공부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학생에겐 <학문의 즐거움>(김영사)과 <마사이 전사 레마솔라이>(황소자리)를, 자퇴를 결심한 학생에겐 <19세>(세계사)를, 습관적으로 자학을 하는 학생에겐 <오이대왕>(사계절)을 권해주는 식으로 도움을 줬다. 연세대 국문과 2학년 김승용(20)씨도 조 교사에게 추천받은 다양한 책으로 진로 결정을 확실하게 할 수 있었다. 수학, 과학 성적이 나쁘지 않아 이과를 택하려고도 했지만 막상 조 교사가 추천해준 이 분야의 교양도서를 보니 전공까지 하기엔 무리다 싶었다고 한다. 반면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기형도의 시 등이 담긴 인문교양서는 문학에 대한 새로운 꿈을 키우게 해줬다. 결국 그는 “이런 게 대학에서 배우는 문학이라면 한 번 해보고 싶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이처럼 진로 결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책의 도움을 받은 사례가 많은 것은 아니다. 많은 학생들이 진로교육의 기초인 ‘자기이해’ 조차 못한 채 진학을 하고, 고등학교까지 오는 일이 많다. 진로교육에 대해 무심한 탓도 있고, 관심이 있어도 왜곡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할모델에 관심이 많은 부모들은 무조건 위인전을 사주고 진로교육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때론 부모가 원하는 분야의 위인전만 주입식으로 읽고 자라는 아이들도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부모들일수록 아이가 자기 적성을 금방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지만 이는 좌절로 끝날 때가 많다"고 말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나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는 학생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조 교사는 “이렇게 자신에 대해 모르는 학생들에겐 그림책을 보여주는 게 특히 좋다”고 말했다. <빨간 늑대>(베틀북), <소피가 정말 화나면, 정말 화나면>(케이유니버스)과같이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고,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잘 다스리는 방법 등을 가르쳐주는 그림책들은 그가 수업 시간 짬짬이 소개했던 책들이기도 하다. 그림책은 그림 위주로 돼 있어 관심을 끌기도 쉽고, 그 안에 온갖 상징요소가 많아 학생 개개인의 해석을 들어보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서울 광희초등학교에서 창의적재량시간에 독서로 진로수업을 하는 청소년직업전문상담사 양성연씨는 “뒤늦게 기본적인 진로고민을 하는 아이들이 나오지 않기 위해선 초등학교 시절부터 단계별 진로교육을 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요즘 광희초 5,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림책으로 진로교육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자존감, 자신감 키워주기, 직업의식 갖기 등 기본적인 과정 가운데 ‘나를 긍정하는 법’을 알려주려고 두 권의 책을 함께 읽었다. 단점이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짧은 귀 토끼>(고래이야기)와 사소한 능력도 소중한 능력이라는 걸 알려주는 <나는 내가 좋아>(중앙출판사)가 그 책들이다. “책 한 권으로 학생이 당장 변해야 한다는 생각은 절대 안 됩니다. 어떤 책 한 구절 덕분에 아이의 심경이 바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죠. 길을 찾아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도록 도와주고 그 과정을 함께 지켜보는 게 바로 진로교육이잖아요.” 대광고 조 교사는 부모가 책을 권하기에 앞서 스스로 ‘진로’의 의미부터 천천히 곱씹어보라고 충고했다. 글· 사진 김청연 기자 carax3@hani.co.kr
‘역할모델’ 맹신 말고 과정 보게 해야 ◎ 인물 책 소개할때 주의점 이순신, 세종대왕, 유관순 자리를 안철수, 반기문, 한비야가 차지하고 있다. 요즘 학생들이 보는 인물 관련 책들은 고대의 정치가나 전쟁영웅만을 소개하지 않는다. 큰 업적을 남기고 죽은 ‘위인’들의 전기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 시대가 주목하는 건 그들보다는 친숙한 인물들이다. 현존하는 이 인물들은 하는 일도 다양하다. 독서 진로교육에서 많이 쓰이는 책인 <나는 무슨 씨앗일까?>(샘터)에는 자연과학자부터 농부, 호텔 총주방장, 화가까지 등장한다. 이는 직업이 다양해진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하면서 역할모델에 대한 신화도 깨주고 있다. 나라를 구해야만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게 아니라 농부와 화가도 이 사회에서 얼마든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변화한 인물 관련 책들이 학생들에게 현실적인 직업관을 심어주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화로 기록될만큼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어서 조심할 부분도 많다. 살아있는 인물이니만큼 그의 행보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위험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6년에 터진 ‘황우석 사태’는 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대표적 사례다. 청소년직업전문상담사 양성연씨는 “그런 점 때문에 인물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누군가가 어떤 태도로 어려움을 이겨냈는지 등 과정 위주로 독서 진로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업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배우는 수준에서 역할모델을 적절히 활용하게 하라는 말이다. “역할모델을 신화처럼 맹신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는 이 충고는 독서 진로교육에서 교사와 학부모의 구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김청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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