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현 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정책실장(가운데)이 19일 오후 서울 세종로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시·군·구별 수능성적 원자료 공개와 관련한 기자간담회를 하던 중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의원 비공개서약서 강제력 없어
교육과학기술부가 19일 대학 수학능력 시험(수능) 성적 원자료를 조전혁 한나라당 의원에게 공개하기로 함에 따라, 수능 성적을 근거로 한 지역·학교간 줄 세우기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교과부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통해 수능 성적 공개를 요구하는 국회의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정보는 각 시·군·구에 속해 있는 학교별 학생들의 수능 점수다. 시·군·구는 실명이 공개되고, 학교는 기호로 처리된다. 예를 들면, 서울시 강서구 ㄱ고등학교(학교 이름은 기호화)의 수능 응시생 모두의 성적표에 적혀 있는 영역·과목별 표준점수와 백분위 점수, 등급이 학생 이름이 가려진 채 제공된다. 교과부는 열람은 하더라도 지역별 순위 등 ‘서열화된 자료’는 서약서에 따라 공개할 수 없으며, 원자료가 아닌 분석·가공한 자료만 외부로 가져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자료의 외부 공개 기준이 모호한데다, ‘학교와 지역의 권익을 침해할 수 있는 자료는 공개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교과부가 제재할 방법도 마땅하지 않아 수능 성적 공개에 따른 학교 서열화는 시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엄상현 교과부 학술연구정책실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어디까지가 학교와 지역의 권익을 침해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판단하기 애매하며, 사안별로 조 의원과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아직 기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딱히 기준을 만들기도 어렵다는 얘기다. 엄 실장은 “국회의원의 양식을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수능 성적이 학교별로 공개될 경우 점수 경쟁이 격화돼 고교 교육이 수능 대비 수업으로 더욱 획일화할 가능성이 크다. 또 고교등급제로 악용될 소지도 있다. 이런 까닭에 수능 성적 공개가 가져올 파장은 누구보다 교육 당국이 잘 알고 있다. 지난 2005년 5월 교육인적자원부는 당시 인천대 교수로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 상임대표를 맡고 있던 조 의원이 수능 원자료 공개를 청구하자 이를 거부했다. 조 의원이 소송을 내 1·2심에서 승소했지만, 교육부는 끝내 공개를 거부하고 상고해 현재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교육부는 상고 이유서에서 “수능 성적이 학교별, 시·도교육청별로 공개되면 전국 학교의 서열화로 인한 과열경쟁, 교육과정 파행 운영 등 부작용이 발생한다”며 “더구나 현행 평준화 체제에서 고교 선배들의 성적이 후배들의 대학 입학전형에 영향을 줄 소지가 있어 정보공개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또 “수능은 대입 전형을 위한 것이지 학술 연구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서자 1년 만에 입장이 180도 바뀌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이날 성명을 내고 “연구 목적으로 공개한다지만, 한 번 공개된 자료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고교를 서열화하고, 고교등급제와 평준화 해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김소연 정민영 기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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