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친필 편지와 서첩 등 국보급 유물이 공개되는 장면. 연합뉴스
우리말 논술 20. 국어 교과서로 논술 접근하기
과목별 논술교과서 / [난이도 수준-중2~고1]
■ 교과서 읽기
논점 1. 정약용의 편지에 담긴 실학 정신
과일·채소·약초를 재배하도록 시골에 살면서 과수원(果樹園)이나 남새밭을 가꾸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버림받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지난번 국상(國喪)이 나 바쁜 가운데도 넝쿨소나무 열 그루와 향나무 한두 그루를 심어 둔 적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집에 있었다면 뽕나무는 수백 주가 됐을 거고 배도 몇 나무, 옮겨 심은 능금나무 몇 주와 감나무들이 지금쯤 밭에 가득 찼을 것이다. 옻나무도 남의 담장을 넘을 정도로 뻗어 나갔을 것이고, 석류도 여러 나무, 포도도 많이 가꾸었을 거고 파초도 대여섯 주는 심었을 거고, 유산(酉山)의 소나무도 이미 여러 자쯤 자랐을 거다. 너희는 이런 일을 하나라도 했는지 모르겠구나. 너희들이 국화를 심었다고 들었는데 국화 한 이랑은 가난한 선비에게 몇 달 동안의 식량을 지탱해 주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니 한낱 꽃구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생지황, 끼무릇, 천궁(川芎)과 같은 것이라든지 쪽나무나 꼭두서니 등에도 모두 마음을 기울여 잘 가꾸어 보도록 하여라. 남새밭 가꾸는 일에는 땅을 반반하게 고르는 일과 규격을 바르게 하는 일이 중요하고, 흙덩이는 모래처럼 가늘게 부숴야 하고, 식물을 심을 때에는 아주 깊이 땅을 파는 일과 거친 흙을 분가루처럼 부드럽게 해야 하며, 씨는 항상 고르게 뿌려야 하며, 모종은 아주 성기게 해야 한다. 아욱 한 이랑, 배추 한 이랑, 무 한 이랑씩 심어 두고 가지나 고추 등속도 마땅히 따로따로 구별하여 심어 놓고 마늘이나 파 심는 일에도 힘을 쓸 것이며, 미나리도 심을 만한 채소다. 또, 한여름 농사로서는 참외만한 것도 없느니라. 절약하고 본농사에 힘쓰면서 아름다운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이 남새밭 가꾸는 일이다. - 고등학교 <국어 상> 어떻게 읽을까 이 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 정약용은 실용적인 가치를 강조하며, 이를 위하여 아들들에게 남새밭을 가꾸기를 권하고 있다. 특히 사군자의 하나로 관상용으로만 여겨졌던 ‘국화’를 식용으로도 활용하라고 한 것은 당시의 통념을 뒤집는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읽을 때에는 글쓴이가 이런 ‘실용적 가치’를 강조한 이유를 생각하며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글이 현대인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 교과 심화 실학의 등장 조선 후기의 학문과 사상에서 나타난 새로운 경향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실학의 발달이었다. 실학은 17~18세기의 사회 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 모순에 직면하여 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대두한 학문과 사회 개혁론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 사회의 모순이 심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은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성리학의 한계성을 자각하고 이를 비판하면서 현실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를 탐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 운동은 이수광, 한백겸 등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저술하여 문화 인식의 폭을 확대하였고, 한백겸은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를 치밀하게 고증하였다. 그 후 실학은 농업 중심의 개혁론,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국학 연구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때 청에서 전해진 고증학과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실학은 18세기에 가장 활발하였으며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여 비판적이면서 실증적인 논리로 사회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 고등학교 <국사>
다산 정약용
1762(영조 38)~1836년(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 연간에 문신으로 벼슬살이를 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다산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
다산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모두 26통이다. 1801년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떠난 것은 2월27일인데 두 아들에게 첫 편지를 보낸 것은 3일 만인 3월2일이고 마지막 편지는 1816년 강진에서 6월17일에 쓴 것이다. 가계는 모두 9편인데 처음 쓴 것은 1808년 4월에 쓴 것이고 가장 늦게 쓴 것은 1810년 9월에 다산초당 동암에서 보낸 것이다. 서간이나 가계는 모두 폐족의 생존법과 가산을 일으킬 수 있는 실용적인 경제 교육, 그리고 자신의 학문을 계승하고 후일을 위해 학문에 전념하기를 염원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다산은 자신으로 인해 폐족이 된 두 아들에게 생존 교육을 치열하게 시키면서, 복권될 그날을 대비하여 서간과 가계로 원격 교육을 했다. - 김상홍, ‘다산의 자식교육 세계
-유배지에서 보낸 서간과 가계(家誡)를 중심으로’(2008)
<동양학 44호>,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 논제 해결 정약용 ‘실용 학문’의 현대적 의미 제시문 (나), (다)를 참고하여 (가)에 나타난 정약용의 실학정신을 분석하고, 이것이 현대인에게 주는 의미를 서술하시오. (800자 안팎) (가) 위 ‘교과서 읽기’의 “시골에 살면서 ~ 이 남새밭 가꾸는 일이다”까지 - 고등학교 <국어 상> (나) 다산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학문 자세를 견지했다. 청나라에서 새롭게 전래된 경전 해석 방법인 고증학이나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 등 새로운 사조에 열려 있었다. 그리고 고증학의 실증적 태도 등 객관적 학문 자세를 따르지만 그에 머물지 않았다. 실증이라는 수단에 매몰되지 않고 실용이라는 목적을 추구했다. 인간과 사회의 가치를 추구했던 것이다. 다산은 속유론(俗儒論)에서 ‘속된 선비는 시의(時宜)를 모르니 어찌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라는 주장에 대해 논하면서, 고루한 선비의 잘못을 질타했다. “참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며, 문(文)에 능하고 무(武)에 능한 것, 이 모두 해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찌 옛사람의 글귀나 따서 글을 짓고, 벌레나 물고기 등류의 해설을 하고, 소매 넓은 선비 옷을 입고서 예모(禮貌)를 익히는 것만이 선비의 학문이겠는가.” 경학과 더불어 다산의 중심과제인 경세학은 당시 사회현실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세상은 썩고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는 것이 다산의 진단이었다.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一毛一髮無非病耳)고 보았으며,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며 개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정약용이 쓴 자찬 묘지명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경세유표>를 지은 동기는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할’(新我之舊邦) 생각이라 했다. 나라를 완전히 개혁하여 새로운 체제로 바꾸려는 의사로 경세유표를 저작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다산은 숱한 개혁안을 내놓았다. - 다산연구소(www.edasan.org) (다) 16세기 중엽 이후,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과 반성의 소리가 다양하게 터져 나왔다. 모름지기 모든 학문은 민중의 실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해야 하고 구체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대두되었고, 그 속에서 공리공론으로 흐른 당시 조선의 학문적 풍토에 대한 반성이 요구되었다. 아울러 청(淸)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영향과 서학(西學)과 같은 서구 문물의 유입 등은 근대 지향적이고 사회 개혁적인 경향을 가진 실학(實學)을 낳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실학 사상은 전개된 양상에 따라서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 그리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 고등학교 <전통윤리> 해결 방향 정약용은 유배 생활에서 농촌의 실상과 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면서 당대의 사회적 모순에 대해 이전보다 더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유배라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사회개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학문을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제시문 (가)의 편지는 바로 이런 글쓴이의 생애와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편지에서 주 내용을 이루는 것은 절약하는 습관을 지니고, 농사를 직접 지으며 수확의 기쁨을 맛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제시문 (나)에 제시된 정약용의 학문 태도와 관련지을 수 있다. 정약용은 기존의 학문 태도를 비판하고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로 학문을 연구할 것을 강조했다. 이는 곧 당대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양반도 학문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제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사항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서술된 (다)와 함께 서술할 수 있으면 된다. (다)에서는 특히 정약용의 사상적 기반이 된 실학 사상이 기존의 학문과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지, 이런 학문의 흐름을 가져온 시대적 상황은 어떤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마지막으로는 이상의 내용이 현대인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를 자신의 주관을 바탕으로 서술하면 된다. 다만 여기에는 ‘농사’를 짓는 등의 현대의 사회·문화적 환경과 어긋나는 부분은 제외하고, 삶에 대한 태도나 사회 인식 등을 중심으로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 자료 검색 다산 정약용의 또다른 편지 살림살이를 꾀하는 방법에 대하여 밤낮으로 생각해 보아도 뽕나무 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이제야 제갈공명의 지혜보다 더 위에 갈 것이 없음을 알았다. 과일을 파는 일은 본래 깨끗한 명성을 잃지 않지만 장사하는 일에 가까우나, 뽕나무 심는 거야 선비의 명성을 잃지도 않고 큰 장사꾼의 이익에 해당되니 천하에 다시 이런 일이 있겠느냐? 남쪽 지방에 뽕나무 365주를 심은 사람이 있는데 해마다 365꿰미의 동전을 얻는다. 1년을 365일로 보면 하루에 한 꿰미로 식량을 마련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궁색하지 않을 것이요, 아름다운 명성으로 세상을 마칠 수 있으니 이 일은 가장 힘써 배워야 할 일이다. 그다음으로는 잠실 3칸을 짓고 잠상을 7층으로 하여 모두 21칸의 누에를 길러 부녀자들도 놀고먹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 또한 좋은 방법이다. 금년에는 오디가 잘 익었으니 너는 그 점을 소홀히 말아라. - ‘전서’, <시학연가계>(示學淵家誡) 실학사상의 역사적 의미와 연구의 전망 실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규정하는 데에도 오늘의 연구자들은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를 못하고 있다. 일부의 연구자들은 실학사상이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끌었고, 각종 제도의 개혁을 가능케 해줌으로서 조선 후기의 발전에 적극 기여했음을 강조했다. 또한 이 사상은 조선 후기의 민중을 대변하는 사상으로서 민생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도 기여했고, 개항기에 이르러서는 개화사상의 형성에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동학농민전쟁기 사회개혁사상의 배경이 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실학사상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견해에 대하여 최근에 이르러서는 긍정 일변도의 평가에 대한 신중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회와 실학자 개개인의 제약성으로 말미암아 실학 사상은 조선 후기 사회에 있어서 본격적 변혁이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거나 사회의 변혁을 도출해 내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사실 당시의 실학자들은 자신의 현실개혁안을 정부 당국에 제시하여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통로와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조정이나 사회의 공론으로 만들기 위한 적극적 노력을 전개하지도 아니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론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한 구체적 노력을 전개하지도 아니했다. 나아가서 19세기 중엽 이후 실학사상은 그 사회개혁적 의지가 약화되는 현상을 드러내었다. 한편,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 양자를 직결시키는 것은 오히려 개화사상의 근대적 측면을 매몰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학에는 그 한계성이 적지 아니하게 발견된다. 이 때문에 실학의 역사적 기능을 재평가하려는 기운이 오늘의 연구자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학사상은 당시 지배층의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사상으로서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 긍정적 기능을 발휘했다.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이 당시 동양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일종의 중세적 보편주의를 극복하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가 가지고 있는 개별성과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는 데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조선의 전통과 현실에 관한 연구를 촉진시켜 주었다. - 민족문화대백과
과일·채소·약초를 재배하도록 시골에 살면서 과수원(果樹園)이나 남새밭을 가꾸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버림받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지난번 국상(國喪)이 나 바쁜 가운데도 넝쿨소나무 열 그루와 향나무 한두 그루를 심어 둔 적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집에 있었다면 뽕나무는 수백 주가 됐을 거고 배도 몇 나무, 옮겨 심은 능금나무 몇 주와 감나무들이 지금쯤 밭에 가득 찼을 것이다. 옻나무도 남의 담장을 넘을 정도로 뻗어 나갔을 것이고, 석류도 여러 나무, 포도도 많이 가꾸었을 거고 파초도 대여섯 주는 심었을 거고, 유산(酉山)의 소나무도 이미 여러 자쯤 자랐을 거다. 너희는 이런 일을 하나라도 했는지 모르겠구나. 너희들이 국화를 심었다고 들었는데 국화 한 이랑은 가난한 선비에게 몇 달 동안의 식량을 지탱해 주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니 한낱 꽃구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생지황, 끼무릇, 천궁(川芎)과 같은 것이라든지 쪽나무나 꼭두서니 등에도 모두 마음을 기울여 잘 가꾸어 보도록 하여라. 남새밭 가꾸는 일에는 땅을 반반하게 고르는 일과 규격을 바르게 하는 일이 중요하고, 흙덩이는 모래처럼 가늘게 부숴야 하고, 식물을 심을 때에는 아주 깊이 땅을 파는 일과 거친 흙을 분가루처럼 부드럽게 해야 하며, 씨는 항상 고르게 뿌려야 하며, 모종은 아주 성기게 해야 한다. 아욱 한 이랑, 배추 한 이랑, 무 한 이랑씩 심어 두고 가지나 고추 등속도 마땅히 따로따로 구별하여 심어 놓고 마늘이나 파 심는 일에도 힘을 쓸 것이며, 미나리도 심을 만한 채소다. 또, 한여름 농사로서는 참외만한 것도 없느니라. 절약하고 본농사에 힘쓰면서 아름다운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이 남새밭 가꾸는 일이다. - 고등학교 <국어 상> 어떻게 읽을까 이 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 정약용은 실용적인 가치를 강조하며, 이를 위하여 아들들에게 남새밭을 가꾸기를 권하고 있다. 특히 사군자의 하나로 관상용으로만 여겨졌던 ‘국화’를 식용으로도 활용하라고 한 것은 당시의 통념을 뒤집는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읽을 때에는 글쓴이가 이런 ‘실용적 가치’를 강조한 이유를 생각하며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글이 현대인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 교과 심화 실학의 등장 조선 후기의 학문과 사상에서 나타난 새로운 경향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실학의 발달이었다. 실학은 17~18세기의 사회 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 모순에 직면하여 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대두한 학문과 사회 개혁론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 사회의 모순이 심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은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성리학의 한계성을 자각하고 이를 비판하면서 현실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를 탐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 운동은 이수광, 한백겸 등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저술하여 문화 인식의 폭을 확대하였고, 한백겸은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를 치밀하게 고증하였다. 그 후 실학은 농업 중심의 개혁론,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국학 연구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때 청에서 전해진 고증학과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실학은 18세기에 가장 활발하였으며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여 비판적이면서 실증적인 논리로 사회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 고등학교 <국사>
다산 정약용
■ 논제 해결 정약용 ‘실용 학문’의 현대적 의미 제시문 (나), (다)를 참고하여 (가)에 나타난 정약용의 실학정신을 분석하고, 이것이 현대인에게 주는 의미를 서술하시오. (800자 안팎) (가) 위 ‘교과서 읽기’의 “시골에 살면서 ~ 이 남새밭 가꾸는 일이다”까지 - 고등학교 <국어 상> (나) 다산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학문 자세를 견지했다. 청나라에서 새롭게 전래된 경전 해석 방법인 고증학이나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 등 새로운 사조에 열려 있었다. 그리고 고증학의 실증적 태도 등 객관적 학문 자세를 따르지만 그에 머물지 않았다. 실증이라는 수단에 매몰되지 않고 실용이라는 목적을 추구했다. 인간과 사회의 가치를 추구했던 것이다. 다산은 속유론(俗儒論)에서 ‘속된 선비는 시의(時宜)를 모르니 어찌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라는 주장에 대해 논하면서, 고루한 선비의 잘못을 질타했다. “참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며, 문(文)에 능하고 무(武)에 능한 것, 이 모두 해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찌 옛사람의 글귀나 따서 글을 짓고, 벌레나 물고기 등류의 해설을 하고, 소매 넓은 선비 옷을 입고서 예모(禮貌)를 익히는 것만이 선비의 학문이겠는가.” 경학과 더불어 다산의 중심과제인 경세학은 당시 사회현실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세상은 썩고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는 것이 다산의 진단이었다.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一毛一髮無非病耳)고 보았으며,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며 개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정약용이 쓴 자찬 묘지명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경세유표>를 지은 동기는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할’(新我之舊邦) 생각이라 했다. 나라를 완전히 개혁하여 새로운 체제로 바꾸려는 의사로 경세유표를 저작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다산은 숱한 개혁안을 내놓았다. - 다산연구소(www.edasan.org) (다) 16세기 중엽 이후,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과 반성의 소리가 다양하게 터져 나왔다. 모름지기 모든 학문은 민중의 실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해야 하고 구체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대두되었고, 그 속에서 공리공론으로 흐른 당시 조선의 학문적 풍토에 대한 반성이 요구되었다. 아울러 청(淸)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영향과 서학(西學)과 같은 서구 문물의 유입 등은 근대 지향적이고 사회 개혁적인 경향을 가진 실학(實學)을 낳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실학 사상은 전개된 양상에 따라서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 그리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 고등학교 <전통윤리> 해결 방향 정약용은 유배 생활에서 농촌의 실상과 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면서 당대의 사회적 모순에 대해 이전보다 더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유배라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사회개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학문을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제시문 (가)의 편지는 바로 이런 글쓴이의 생애와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편지에서 주 내용을 이루는 것은 절약하는 습관을 지니고, 농사를 직접 지으며 수확의 기쁨을 맛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제시문 (나)에 제시된 정약용의 학문 태도와 관련지을 수 있다. 정약용은 기존의 학문 태도를 비판하고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로 학문을 연구할 것을 강조했다. 이는 곧 당대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양반도 학문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제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사항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서술된 (다)와 함께 서술할 수 있으면 된다. (다)에서는 특히 정약용의 사상적 기반이 된 실학 사상이 기존의 학문과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지, 이런 학문의 흐름을 가져온 시대적 상황은 어떤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마지막으로는 이상의 내용이 현대인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를 자신의 주관을 바탕으로 서술하면 된다. 다만 여기에는 ‘농사’를 짓는 등의 현대의 사회·문화적 환경과 어긋나는 부분은 제외하고, 삶에 대한 태도나 사회 인식 등을 중심으로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 자료 검색 다산 정약용의 또다른 편지 살림살이를 꾀하는 방법에 대하여 밤낮으로 생각해 보아도 뽕나무 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이제야 제갈공명의 지혜보다 더 위에 갈 것이 없음을 알았다. 과일을 파는 일은 본래 깨끗한 명성을 잃지 않지만 장사하는 일에 가까우나, 뽕나무 심는 거야 선비의 명성을 잃지도 않고 큰 장사꾼의 이익에 해당되니 천하에 다시 이런 일이 있겠느냐? 남쪽 지방에 뽕나무 365주를 심은 사람이 있는데 해마다 365꿰미의 동전을 얻는다. 1년을 365일로 보면 하루에 한 꿰미로 식량을 마련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궁색하지 않을 것이요, 아름다운 명성으로 세상을 마칠 수 있으니 이 일은 가장 힘써 배워야 할 일이다. 그다음으로는 잠실 3칸을 짓고 잠상을 7층으로 하여 모두 21칸의 누에를 길러 부녀자들도 놀고먹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 또한 좋은 방법이다. 금년에는 오디가 잘 익었으니 너는 그 점을 소홀히 말아라. - ‘전서’, <시학연가계>(示學淵家誡) 실학사상의 역사적 의미와 연구의 전망 실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규정하는 데에도 오늘의 연구자들은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를 못하고 있다. 일부의 연구자들은 실학사상이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끌었고, 각종 제도의 개혁을 가능케 해줌으로서 조선 후기의 발전에 적극 기여했음을 강조했다. 또한 이 사상은 조선 후기의 민중을 대변하는 사상으로서 민생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도 기여했고, 개항기에 이르러서는 개화사상의 형성에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동학농민전쟁기 사회개혁사상의 배경이 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실학사상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견해에 대하여 최근에 이르러서는 긍정 일변도의 평가에 대한 신중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회와 실학자 개개인의 제약성으로 말미암아 실학 사상은 조선 후기 사회에 있어서 본격적 변혁이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거나 사회의 변혁을 도출해 내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사실 당시의 실학자들은 자신의 현실개혁안을 정부 당국에 제시하여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통로와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조정이나 사회의 공론으로 만들기 위한 적극적 노력을 전개하지도 아니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론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한 구체적 노력을 전개하지도 아니했다. 나아가서 19세기 중엽 이후 실학사상은 그 사회개혁적 의지가 약화되는 현상을 드러내었다. 한편,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 양자를 직결시키는 것은 오히려 개화사상의 근대적 측면을 매몰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학에는 그 한계성이 적지 아니하게 발견된다. 이 때문에 실학의 역사적 기능을 재평가하려는 기운이 오늘의 연구자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학사상은 당시 지배층의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사상으로서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 긍정적 기능을 발휘했다.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이 당시 동양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일종의 중세적 보편주의를 극복하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가 가지고 있는 개별성과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는 데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조선의 전통과 현실에 관한 연구를 촉진시켜 주었다. - 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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