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운의 우리말 탄생과 진화
이재운의 우리말 탄생과 진화 / [난이도 수준-중2~고1]
25. 일제 강점기, 한자의 탈을 쓰고 몰려든 일본어
26. 미국어 홍수를 어떻게 견뎌야 하나 (마지막회)
예전에는 영어라고 하면 으레 영국어인 줄 알았지만, 오늘날에는 미국어가 더 영어 행세를 하게 되었다. 사투리가 표준어를 이긴 셈이다. 마치 오늘날 우리 한국어의 표준은 백제어가 차지했지만, 천년 전에는 고구려어가 민족어의 표준이었던 것과 같다.
우리나라가 영어의 홍수에 파묻히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 무정부 상태에서 군정청이 들어서고 한국전쟁 때 연합군이 들어와 주둔하면서부터다. 전에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일본식 발음의 영어 어휘를 쓰는 정도였지만 이때부터는 영국어와 미국어가 직접 통용되기 시작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우리나라는 외국어 중에서도 영어를, 영어 중에서도 미국어를 더 많이 배운 셈이다. 이러다 보니 일제 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하거나 징용·징병으로 나가 산 인구 못지않게 많은 유학생과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나가 살고 있다. 우리말 차원에서 보자면 원나라로 유학하거나 이민한 고려인들, 일본으로 유학·이민하거나 징용·징병당한 조선인들, 20세기부터 미국으로 유학·이민한 한국인들이 외래어를 들여오는 거대한 창구 노릇을 한다. 몽골어는 어휘만 들어왔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일본어는 언어 자체가 들어와 공용어로 쓰임으로써 우리말 문법을 변형시키고, 이에 따라 갓 쓰이기 시작한 한글은 큰 시련을 겪었다. 그런데 미국어는 우리나라 공용어가 아님에도 일본어가 우리말에 남긴 상처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언론에 이르기까지 미국어를 거침없이 쓰고 있다. 정부의 정책·홍보 분야에서 미국어는 마치 준공용어 수준으로 쓰인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비즈니스 프렌들리’니 하는 영어 문장을 남발하면서 정부 기관에서도 다투어 쓰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도 걸핏하면 시민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문장형 영어 슬로건을 걸어놓는다. 언론·방송·광고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말은 한글로 표기된 지 겨우 백년 남짓 되었다. 맞춤법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아 실제 언어생활에서 불편한 일이 많다. 영어의 F는 한글로 적을 수도 없고, 발음도 어정쩡하게 내고 있다. 한글을 닦아나가는 일은 벅차고, 우리말에서 한자어 독을 빼내고, 일본어 독을 빼내는 일도 다 끝나지 않았고, 아직도 힘들다. 한글이 공용 문자가 된 1894년 이래 백여 년이 지났지만 한자어, 일본어가 많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어 어휘가 홍수처럼 밀려들어 우리 생활 속으로 파고든다. 한자어와 일본어는 대부분 뜻글자(표의문자)인 한자로 돼 있어서 가려 쓰기나 쉽지, 영어는 한글과 같은 소리글자(표음문자)라서 자칫하면 우리말에 뿌리를 내려 변형될 가능성이 많다. 꼭 필요한 외래어라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받아들여야 하지만 우리말로 표현이 충분한 분야에서도 영어가 쓰이니 문제다. 앞으로 백년 뒤 어원 연구자들은 영어에서 온 우리말을 정리하느라 바쁠 것이고, 미국 중심의 세상이 변한 뒤에는 또 우리말에서 영어 독을 뺀다고 시끄러울지도 모른다. 일제 강점기 친일파들처럼 미국이 망하겠느냐고들 하는 분도 있겠지만, 역사상의 세계제국들도 결국은 망했다. 외래어를 슬기롭게 가려 써서 우리말을 잘 가꿔나가야 한다.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대표 저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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