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비타민제’ 영화, 꼭꼭 씹어 보기
있을 법한 얘기에 몰입하며 성찰
부정적 경험 떠올리며 스스로 치유
다양한 관계 ‘간접경험’ 효과도
부정적 경험 떠올리며 스스로 치유
다양한 관계 ‘간접경험’ 효과도
‘성장 비타민제’ 영화, 꼭꼭 씹어 보기
학교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시험을 ‘망쳤다.’ 친구들한테 털어놓기에도 창피한 점수였다. 집에 와 펑펑 울었다. 우울했다. 그럴 때면 늘 그랬듯이 <중경삼림>을 비디오 플레이어에 넣었다. 7살 때부터 취미처럼 봐 온 영화다.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패스트푸드점에서 ‘캘리포니아 드리민’이라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여자 주인공을 보며, 마음으로 같이 춤을 춘다. 몸짓 하나로 어두운 배경을 밝히는 그녀처럼 우울하고 힘겨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조예슬(17)양한테 <중경삼림>은 아플 때 맞는 ‘주사’다. 영화를 보는 두 시간의 마법은 놀랍다. 단순한 오락으로 즐기는 이도 있지만 누군가는 예슬양처럼 영화를 통해 치유받고, 성장한다. 영화의 이런 기능에 주목하는 ‘영화치료’라는 분야도 있다. 방학, 책 한 권 읽기는 어렵지만 영화 한 편 보기는 쉽다. 사춘기, 공부만이 살 길이지만 ‘쓸데없는’ 고민들은 날로 자란다. 고민 해결의 실마리를 영화에서 얻어보자. 영화치료사로 활동하는 주순희 한국영상응용연구소(www.healingcinema.co.kr) 연구원이 고등학생들을 만나 영화를 성장의 비타민제로 삼키는 방법을 직접 안내했다.
너의 ‘이너 무비’는 뭐니?
지난 20일 한겨레교육문화센터의 한 강의실, 둘 씩 짝지어 앉은 고등학생들은 서로의 손 모양을 그려주고 있었다. 각자의 도화지에는 다섯 손가락이 뚜렷한 손바닥이 생겼다. “손가락마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영화를 적어 보세요. 내 삶에 작은 변화를 가져온 영화나, 나도 모르게 자꾸 반복해서 보는 영화 같은 거요.” 주순희 연구원의 말에 학생들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서울시청소년미디어센터(스스로넷)에서 영화 동아리 활동을 할 정도로 영화를 좋아하는 네 학생은 어떤 영화를 꼽았을까?
“저는 얼마 전에 <마더>를 봤는데요, 김혜자씨가 춤을 추면서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울기 시작해서 내내 울었어요. 단순히 슬퍼서 운 건 아니었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마음 한쪽이 너무 스산해지고 요동치는 게 느껴졌어요.” 오세인(18)군의 말에 주순희 연구원은 “기억에 오래 남는 영화나 장면을 통해 스스로를 지배하거나 괴롭히는 핵심감정을 파악할 수 있다”며 “영화는 천 개의 거울을 갖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자기한테 특별한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가 자신의 어떤 감정과 경험을 비추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네 시간 남짓 진행된 영화치료사와의 만남에서 모두는 별명을 썼다. 오세인군은 ‘에이타’라는 일본 영화배우의 이름을 꼽았다. 겉으로는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가슴에는 비범함이 숨어 있는 그가 좋다고 했다. <마더>의 독무를 보고 눈물을 흘렸던 것과 에이타의 캐릭터를 흠모하는 마음은 그의 무엇을 비추는 걸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힌 청소년이라면 좋아하는 영화를 놓고 고민해 볼 만한 일이다.
어떤 인물이랑 동일시하게 되니?
모두 함께 <미스 리틀 선샤인>을 봤다. 파산, 실직, 자살 등 실패와 좌절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가족들이 막내딸을 위해 긴 여행을 떠나면서 가족애를 재발견하는 영화다. 주순희 연구원은 “등장인물 가운데 감정이입이 되는 인물이나 아니면 유독 싫은 인물이 있더냐”고 물었다. “저는 꼬마 주인공 올리브의 오빠인 드웨인을 보면서 ‘아, 내가 저랬는데’ 싶었어요. 저도 가족보다는 저 자신을 먼저 생각했거든요. 가족이 모두 나들이 갈 때도 다른 약속이 있거나 좀 귀찮으면 그냥 안 갔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요.” 이가은(17)양은 그러나 가족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드웨인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영화를 본 소감을 그림으로 그렸다. 이가은양은 세모를 그리고 테두리를 까만색으로 칠한 뒤 그 안을 밝은 노랑으로 채웠다. “가족들 개개인은 색깔이 전부 다른데 다른 색을 섞으면 결국 검은색이 나오잖아요. 검은색은 가족이 하나가 됐다는 거고요, 안에 노랑은 그래도 이 가족들 사이에는 해체되지 않을 수 있는 사랑과 애정이 있고 또 가족 하면 단단히 뭉친 달걀 노른자 같은 생각이 나기도 해서 골랐어요.”
주순희 연구원은 “영화는 사실에 가까운, 언제나 있을 법한 ‘핍진성’(verisimilitude)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매체보다 감정이입이나 동일시가 빠르게 일어난다”며 “어떤 영화에서 내가 누구랑 비슷하다고 느끼는지, 어떤 관계에 좀더 몰입하게 되는지를 따져보면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영화는 또한 ‘관계’를 학습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학교와 학원에 갇혀 다양한 관계를 경험하지 못하는 청소년들한테 영화가 교육적인 효과를 내는 부분이다.
어떤 경험이 떠오르니?
<빌리 엘리어트>의 한 장면도 같이 봤다. 발레리노를 꿈꾸는 빌리가 왕립 발레학교의 엄격한 심사위원들 앞에서 오디션을 보는 장면이었다. 주순희 연구원은 “빌리는 오디션에 합격했을까? 이 장면에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경험이 있으면 얘기해 보라”고 말했다. “엄한 표정을 하고 있는 심사위원 앞에 선 빌리를 보니까 얼마 전에 발표를 했던 게 생각나요. 친구들하고 같이 발표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저 때문에 잘 못했어요. 같이 한 친구들한테 미안해서 많이 속상했어요.”
주순희 연구원은 영화를 보면서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이나 감정이 떠오를 때가 치유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당시에는 잘 모르고 지나쳤던 나의 마음 상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자기 심리를 통찰하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영화에서 그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는 거죠. 빌리가 결국 오디션에서 합격하는 것을 보며 과거의 경험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거예요.”
조예슬양은 빌리가 합격할 것 같으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나는 실패했지만 빌리는 성공할 것 같다”고 말했다. 빌리를 통해 이미 조예슬양은 긍정적인 메시지를 발견한 것일까. 조예슬양은 집으로 돌아가 <빌리 엘리어트>를 다시 보겠다고 했다.
진명선 기자 ed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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