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중2~고1] 인문학은 모든 공부의 뿌리입니다. 인간과 세계의 본연을 탐색하는 ‘인문학 정신’은 삶·죽음·정의 등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인문학 소양이 튼튼한 사람은 교과서를 뛰어넘어 ‘큰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함께하는 교육>은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를 통해 인문학의 역사에서 고전으로 꼽히는 책과 현대의 책을 서로 엮어 ‘인문학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소개하려 합니다. 많은 호응 부탁드립니다. 1. 애정 어린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낫다? <스키너의 월든 투> B.F. 스키너 지음, 이장호 옮김. 2006
<탤런트 코드> 대니얼 코일 지음, 윤미나 옮김. 2009
〈스키너의 월든 투〉, 〈탤런트 코드〉.
월든 투는 천 명 남짓 사는 마을. 주민들은 착하고 성실한데 하루 네 시간만 일한다. 경쟁도 없다. 더 일한다고 누가 알아주거나 상을 주지도 않는다. 이런 사회라면 사람들은 게으름 피며 늘어지지 않을까? 스키너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들은 훈련된 비둘기 같다. 다섯 살배기 아이는 막대 사탕의 유혹을 몇분 동안 견뎌야 한다. 머리가 깬 아이들은 자기 눈에 안 띄도록 사탕을 감춘다. 유혹을 피하는 데 성공한 아이들에게는 더 높은 과제가 주어진다. 사탕을 목에 걸어준다.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성공하면 다음 단계가 기다린다. 행동공학은 과학적인 단계를 밟아 인간을 차근차근 변화시킨다. 성격·능력·동기 등 마음 안의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월든 투>를 읽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사람을 길들여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짓은 독재자에게나 어울리지 않겠는가? 이런 의문에 스키너는 목소리를 높인다. 독재라고?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어리석은 민주주의보다는 따뜻한 독재가 훨씬 낫다. 민주주의는 늘 자유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망가지는지를 생각해 보라. 학교만 해도 그렇다. 학생들은 ‘자유롭게’ 경쟁하지만 성공하는 이들은 극소수다. 성공한 한 명을 위해 1000명이 낙오하는 구도다. 뒤처진 이들은 ‘자유롭게’ 대책 없이 버려진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직업 선택의 ‘자유’를 내세우지만, 과연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월든 투에서는 적어도 이런 비극은 없다. 환경을 조작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거리를 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행동공학으로 나쁜 감정을 없애버려 열등감·두려움·슬픔도 없다. 그렇다면 어설픈 민주주의보다 월든 투가 못한 까닭이 뭐 있겠는가. 게다가 스키너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벌보다 상을 써야 한다는 입장이다. 야단치면 하던 짓을 금세 멈추기는 할 테다. 그러나 처벌이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나쁜 습관은 다시 도진다. 행동은 칭찬과 보상을 통해서만 바뀐다. 이른바 ‘긍정적 강화’(positive reinforcement)의 효과다. 대니얼 코일이 쓴 <탤런트 코드>도 <월든 투>의 행동공학을 떠올리게 한다. 코일은 뛰어난 운동선수, 음악가 등을 낳은 교육기관을 찾아다녔다. 조사 끝에 그는 천재를 만드는 비결을 찾아냈다. ‘탤런트 코드’란 바로 유능함을 이끄는 공식이다. 천재를 만드는 비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분야라도 성공하려면 ‘1만 시간의 노력’을 해야 한단다. 적어도 하루에 3시간씩 10년을 투자해야 결실을 거둔다는 뜻이다. 우리 학생들도 10년이 넘게 하루 10시간 가까이를 나무 의자에 앉아서 보낸다. 그런데 왜 다들 수재가 되지 못했을까? 대니얼 코일이라면 이렇게 대답할지 모르겠다. 단순히 용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제대로 된 노력’이 중요하다. 우리 두뇌는 뉴런이라는 신경회로로 되어 있다. 회로가 단단히 엮이기 위해서는 무수한 반복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미엘린이라는 물질이 뉴런 더미들을 제대로 감싸게 될 테다. 예컨대, 연습이 쌓인 체조선수는 ‘다리를 들어 올리며 등을 활처럼 휘게 하고, 머리를 어깨 뒤로 밀면서 엉덩이를 돌린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엘린으로 잘 감싸인 뉴런 회로들을 따라 ‘자동적으로’ 몸을 움직일 뿐이다. 재능은 잘못된 부분을 찾아 고치며 수없이 반복하는 가운데 어느새 몸에 밴다. 제대로 된 자극과 반복이라는 점에서 탤런트 코드는 행동공학과 닮은꼴이다. 안타깝게도, 능력을 제대로 틔워준다는 ‘마스터 코치’들에게서 우리는 또다시 독재의 모습과 만난다. 유능한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깊고 흔들림 없는 시선’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학생 하나하나의 결점을 정확하게 교정한다. 문제는 그들의 말투다. 그들은 “~하면 어떻겠니?”, “~하면 어떨까?” 하는 민주적인 말투를 쓰지 않는다. “이제 ~해봐”, “~해야지” 하며 강하게 지시한다. 때문에 학생은 확신을 갖고 학습에 매달린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따뜻하고 배려 깊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 두 책을 따라 읽다 보면 혼란스러워진다. 과연 민주주의는 독재보다 나은 제도일까? 오히려 현명하고 따뜻한 독재가 무능한 민주주의보다 낫지 않을까? 스키너는 정치로는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오히려 문제는 일을 풀어가는 이들의 마음가짐과 능력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경제발전으로 독재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를 바 없이 들린다. 실용적인 해결책들은 철학적인 의문을 끊임없이 일으킨다. 당신이라면 따뜻한 독재와 무책임한 민주주의 가운데 무엇을 택하겠는가?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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