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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끼’ 를 키우는 학교

등록 2009-09-20 21:14수정 2009-09-20 21:25

한림연예예술고에서는 연습실이 곧 교실이다. 사진은 비보잉을 연습하는 학생들의 모습.
한림연예예술고에서는 연습실이 곧 교실이다. 사진은 비보잉을 연습하는 학생들의 모습.
‘연예인 양성’ 한림연예예술고를 가다
에어 트랙(Air track) 또는 에어 플레어(Air flares). 물구나무를 선 채로 오직 바닥을 짚은 두 손으로 온 몸을 돌리는 ‘브레이크 댄스’의 한 동작을 말한다. 최근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비보이(B-boy, 브레이크 댄스를 전문적으로 추는 남자들)’들의 춤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인터넷에는 이 춤에 대한 ‘동영상 강의’가 올라와 있고 ‘비보잉(B-boying, 브레이크 댄스를 일컫는 다른 말)’에 빠진 대개의 청소년들은 독학으로 춤을 익힌다.

김재권(17)군은 다르다. 그한테는 선생님이 있다. 세계 4대 비보잉 대회 가운데 하나인 ‘UK 비보이 챔피언십’에서 2007년 우승했던 나경식(25) 강사다. ‘진도’도 있다. 한 학기 동안 그는 ‘비보이 댄스’라는 과목에서 ‘스트리트 댄스(street dance)의 역사적 배경’, ‘스트리트 댄스의 장르’, ‘시대별 힙합 댄스 역사’, ‘하우스 댄스의 기원’ 등을 차례로 배운다. 그는 학교에서 비보잉이라는 춤을 ‘공부한다.’ 김재권 군은 한림연예예술고 실용무용과 1학년 학생이다.

춤-연기 잘하면 우등생으로 인정해 주는 곳

한림연예예술고는 올 3월에 개교한 학교로 방송·연예 분야에 끼와 재주를 지닌 학생들을 위한 곳이다. 실용무용과를 비롯해 연예과, 뮤지컬과 등 3개 학과가 있다.

노래, 춤, 연기에 적성이 있는 학생들이 진학하는 한림연예예술고에서는 비보이 댄스가 국어·영어·수학처럼 독립된 과목으로 인정되고, 에어 트랙이 집합·수열·함수와 같이 학습된다. 학생들은 오전에는 국·영·수·사·과 등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에 따른 과목을 배우고 오후에는 자기가 속한 학과의 실기 수업을 받는다. ‘댄스 스포츠’, ‘재즈 댄스’, ‘비보이 댄스’(실용무용과), ‘연기자 실기’, ‘마임 실기’(연예과), ‘보컬실기’, ‘무용실기’(뮤지컬과) 등의 수업이 오후에 열린다. 이 과목들은 다른 교과와 마찬가지로 중간·기말고사를 치른다.

춤을 잘추는 것을 수학을 잘하는 것만큼 인정해주는 곳에서 학생들은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당당하게 커밍아웃한다. 고은비(17)양은 “연예인이 된다고 하면 주변에서 겉멋만 들었다고 비웃을까봐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교사·의사·공무원을 꿈꾸는 10대와 연예인을 꿈꾸는 10대를 달리 대우하는 세상의 삐딱한 시선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왠만큼 공부해서는 인정받을 수도 없는” 학교를 그만두고 “공부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올해 한림연예예술고 1학년으로 다시 입학했다. 방송·연예 분야로 진로를 결정했고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다.


조영범(17)군은 이곳에서 자퇴의 상처가 아물었다. “연예인 한다는 게 소문나는 바람에 수업 시간에도 이유없이 불려나가 맞았어요. 어떤 선생님은 다른 학교에 가서 놀지 왜 우리 학교에 왔냐고도 하셨죠. 연기 연습 한다고 야자를 안 했는데 결국 선생님들이 괜히 물 흐리지 말고 전학을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전학 갈 곳을 찾지 못해 자퇴를 하게 됐어요.” 내신 등급과 수능 점수가 곧 적성과 능력이 되는 학교에서 연기를 하고 싶은 그는 “양아치”일 뿐이었다. 제 ‘물’을 만난 지금의 그는 점심시간을 쪼개 연습을 하는 성실한 ‘연습벌레’로 통한다.

‘노는’ 아이들 물 만난 듯 연습벌레로 재탄생

학교는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흥미와 적성을 갖춘 학생들한테 이 직업이 요구하는 능력과 소양을 갖추도록 교육한다. 김현주 연예과 학과장은 “90%의 타고난 능력을 가진 사람보다 20%밖에 안 되는 능력을 노력으로 극복하고 90%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더 탁월하다”며 “모든 직업이나 학문이 그렇듯이 연기도 기초가 중요하고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연예과에서는 몸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연기의 기초가 된다고 보고 ‘마임 실기’를 정규 과목에 편성했다.

실용무용과에서 순수무용의 갈래인 현대무용을 배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대무용을 가르치는 류장현(26) 강사는 “고전 무용이나 현대 무용 같은 순수 무용이나 비보잉 같은 실용 무용까지 춤의 기본기는 다 똑같다”며 “비보잉은 학생들이 자칫 테크닉에 집착할 수 있는데 현대 무용을 배우면서 기본기를 익히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가 적극적으로 기회를 마련하는 ‘오디션’은 훌륭한 직업 체험의 기회가 된다. 지금까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조연 오디션, 드라마 <내조의 여왕>을 만든 기획사의 오디션, 섬유유연제 광고 오디션 등 영화, 광고, 연예인 기획사의 오디션이 10여 차례 넘게 학교 안에서 열렸다. 이번 여름 조인성, 한예슬 등이 소속한 ‘사이더스HQ’의 오디션에 참가해 최종 본선에 오른 김보송(15)양은 “오디션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나한테 뭘 원하는지,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빨리빨리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며 “그런 경험이 평소에 연습할 때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김지연 전략기획실장은 “광고 모델 오디션을 보고 통과한 뒤 촬영까지 해도 막판에 방송되지 않는 일도 흔한데 아이들이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이 일의 직업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 같다”며 “오디션을 보고 실패를 경험하면서 겸손을 배우는 것도 이 직업에 필요한 소양을 쌓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비보이-연기-마임-무용 …당당하게 꿈 키워

뭣보다 학생들은 학교의 교육 과정을 통해 다른 분야에 견줘 안정적인 진로 설계가 어려운 방송·연예 분야에서 ‘살아남는’ 길을 스스로 터득한다. 김재권 군은 “학교에 다니면서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라는 공연에 한번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춤으로 하는 연기’가 하고 싶어졌다”며 “앞으로 극단을 꾸리고 안무를 짜서 ‘댄스컬’을 무대에 올리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비보잉을 강의하는 나경식 강사는 “춤 자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춤으로 사회에 진출해 본 경험에 대해서도 많이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10대 소년이 안무가, 댄스컬 연출자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데는 분명 ‘교육’의 힘이 있다. 기은주 실용무용과 학과장은 “연예인에 흥미와 적성이 있는 아이들은 흔히 ‘노는’ 아이로 치부되기 쉽다”며 “학교에 와서 이쪽 분야에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스스로 진로를 설계하는 것을 보면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연예인이 되려고 ‘노예 계약’ 문제가 불거진 기획사 오디션에 줄을 서는 학부모와 학생들, 아직도 연예인을 직업이 아니라 ‘딴따라’ 정도로 인식하는 학부모와 교사들이 있는 현실에서 한림연예예술고의 학생들이 행복한 이유다. 진명선 기자 ed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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